의정대화 막는 블랙리스트…"부역자 꼬리표에 딴목소리 못 낸다"

김병규 2024. 9. 11. 16:05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대화 국면마다 소통 막아…"블랙리스트 해결없인 협상 목소리 안 나올 것"
정치권 협의체 제안에도 대화론 고개 못 들어…"언젠가는 대화해야 할 텐데" 한숨
"복귀 원하는 전공의도 많지만, 강경파에 휘둘려 그렇게 못해"
의대 증원 갈등 언제까지 (대구=연합뉴스) 윤관식 기자

(서울=연합뉴스) 김병규 권지현 기자 = "의대 2천명 증원이나 필수의료 패키지에 찬성해서가 아니라, 그저 제 직장이라서 일을 하는 건데 부역자라니요. 블랙리스트 문제가 해결 안 되면 정부와 협상을 하자는 목소리는 안 나올 겁니다."

의사들이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인터넷 사이트에서 '부역자'로 신상이 공개된 한 의사가 11일 연합뉴스에 하소연하며 내놓은 말이다.

그는 "어떤 전공의나 의대생도 반년 넘게 통으로 일터나 강의실을 떠나고 싶어 하지 않는다"면서도 "이 문제(블랙리스트)가 해결되지 않으면 복귀도, 대화도 힘들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정부와 의료계 등에 따르면 지난 2월 이후 이어진 의료공백 사태에서 정부가 유화책을 내놓으며 복귀나 대화를 요청할 때마다 블랙리스트라는 '보이지 않는 손'이 의료계 내의 소통을 막고 있다.

전공의 집단이탈 초기인 지난 3월 초에는 의료 현장을 떠나지 않은 전공의들의 신상이 '참의사 리스트'라는 이름으로 의사 인터넷 커뮤니티 '메디스태프'에서 공개됐다.

미복귀자에 대한 처벌이 가시화되던 지난 6월 말에는 같은 커뮤니티에 복귀 전공의뿐 아니라 복귀 의대생, 전공의 자리를 메우는 전임의(펠로) 등의 명단이 담긴 '복귀 의사 리스트'가 등장했다.

다음 달인 7월에 정부가 전공의들에 대한 처분을 철회하면서 의료현장 복귀를 유도하자 이번에는 '감사한 의사-의대생 선생님 감사합니다'라는 텔레그램 채팅방이 만들어져 의료현장을 지키는 의사들의 신상을 공개했다.

응급실로

이번에는 추석 연휴를 앞두고 응급실 위기가 커지는 가운데 응급실에서 근무 중인 의사의 명단까지 포함한 블랙리스트가 다시 등장했다.

의사들이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아카이브(정보 기록소) 형식의 사이트인 '감사한 의사 명단'이다.

매주 업데이트되는 방식인데, 현장의 의사나 대학에 돌아간 의대생 외에 '응급실 부역'이라는 이름과 함께 응급실을 운영하는 병원별 근무 인원과 명단이 게시됐다.

'응급실 뺑뺑이' 사망 사고가 잇따르는 상황에서 응급실에서 근무하는 의사의 신상을 공개하며 비판하는 것도 악의적이지만, 이 사이트는 의료계 내 '다른 목소리'가 나오는 것을 막는다는 점에서 의정 대화를 통한 사태 해결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

무엇보다 이 사이트는 전공의·의대생의 복귀를 독려하거나, 협상의 필요성을 제기한 의사들의 신상마저 공개하고 있다.

한 전공의에 대해서는 "협상하자면서 여기저기 나대고 다닌다"고 비난했고, 진료지원(PA) 간호사 합법화에 찬성한 한 의대 교수의 이름을 욕설과 함께 게시한 글도 있다.

한 글은 의대 교수인 전공의의 아버지가 집단사직에 부정적인 것을 들어 두 사람을 같이 비판하기도 했다.

동료들에게 자칫 대화하자고 제안했다가 '조리돌림'을 당하는 상황인 만큼, 의료계 내에서는 강경 주장이 아닌 '다른' 목소리가 나오기 힘든 상황이다.

응급실 앞 줄 선 환자들 (서울=연합뉴스) 서대연 기자

이런 분위기는 최근 정부와 정치권이 2026년 의대증원 원점 논의를 언급하며 여야의정 협의체 구성을 제안했음에도, 의료계에서는 '대화론'이 본격적으로 부각되지 않고 있는 것과도 관계가 있어 보인다.

의료계 일부에서 대화에 응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기도 했지만, '2025년도 의대증원부터 원점에서 논의해야 한다', '장관과 차관을 경질하고 정부가 사과해야 한다' 등 강경한 입장이 지배적이다.

의대생 A씨는 "'의대증원 불가, 간호법은 악법, 의사는 안 부족하다'는 얘기 이외에는 다 틀어막고 블랙리스트에 올리는 게 지금의 상황"이라고 전했다.

그는 "마냥 '탕핑'(가만히 누워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의미의 중국 신조어)할 수도 없으니 언젠가는 대화에 나서야 한다는 게 상식적인 생각이지만, 상식적인 토론은 기대를 못 하는 상황"이라고 했다.

의사 B씨는 "블랙리스트에 이름이 오른 후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정도의 피해를 입고 있다"며 "정부에서 비상진료체계를 가동하고 공보의와 군의관을 파견하고 있지만,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것은 블랙리스트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의대 교수 C씨는 "블랙리스트만이 문제가 아니다. 의사 게시판 같은 데를 가도 다른 의견을 제시하는 것 자체가 힘들다"며 "복귀하고 싶어 하는 전공의들도 많아 보이는데, 강경파에 휘둘려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어 보인다"고 진단했다.

bkkim@yna.co.kr

▶제보는 카톡 okjebo

Copyright © 연합뉴스. 무단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