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급실 투혼에 128년 전 기사 찾고 '유레카'…역사 되살린 노력(종합)
노트 7권에 작업 빼곡히 기록…흑백사진 속 '색' 찾으려 고군분투
(서울=연합뉴스) 김예나 기자 = 근대 건축을 전공한 김종헌 배재대 교수에게는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은 '작업 일지' 7권이 있다.
그 속에는 2015년 8월부터 약 2년간 미국 워싱턴DC에 머무르며 느낀 감정부터 설계부터 시공까지의 건축 공사 과정, 사람들과 주고받은 수많은 명함이 담겨 있다.
대한제국이 펼친 자주외교 노력이 새겨진 공간이자 국권을 빼앗긴 아픈 역사가 함께 남아있는 곳, 주미대한제국공사관을 되살리고자 고군분투한 흔적이다.
김 교수는 11일 연합뉴스와 통화에서 초대 주미전권공사인 박정양(1841∼1905)도 미국에서의 경험을 담은 '미행일기'(美行日記)를 남겼다며 "공사관과 관련한 순간순간을 기록했을 뿐"이라고 회상했다.
그의 손길이 곳곳에 묻어있는 주미대한제국공사관은 지난 9일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미국의 국가사적지(NRHP·National Register of Historic Places)에 등재됐다.
김 교수는 평소 공사관을 '한국 속의 미국, 미국 속의 한국'이라고 표현한다며 "한국의 역사를 넘어 세계 역사의 한 축으로 인정받고 가치를 공유하게 돼 기쁘다"고 말했다.
2013년부터 약 5년간 진행된 공사 과정은 녹록지 않았다.
공사관이 처음 들어섰을 당시인 19세기 모습은 비교적 온전히 남아있었으나 군인 휴양시설, 화물운수노조 사무실 등으로 쓰이며 곳곳이 변형돼 있었다.
과거 노조가 입주하면서 공간을 확보하고자 계단 등 곳곳을 변형했던 점은 복원이 특히 필요한 부분이었다.
여러 차례 도면을 검토하고 밤낮으로 작업에 몰두했던 김 교수는 쓰러져 응급실에 실려 가기도 했다.
김 교수는 "막힌 천장을 뚫고 목재 바닥을 보수·정비하면서 건물의 옛 흔적도 많이 찾았다"며 "한국은 물론, 다양한 국가 출신의 장인들과 함께 만들어낸 결과물"이라고 했다.
복원 공사를 하면서 하인이 쓰던 전용 계단 흔적을 찾아내 그대로 남겨둔 것도 의미가 있다고 김 교수는 설명했다.
공사관 내부를 과거 모습 그대로 되돌리는 일 역시 만만치 않았다고 한다.
1893년에 촬영한 것으로 추정되는 헌팅턴도서관 소장 사진은 모두 흑백으로 돼 있다. 가구, 벽지, 카펫 등의 형태는 확인할 수 있지만 정확한 색을 알기 어렵다는 의미다.
근대 건축 실내 재현 전문가로서 덕수궁ㆍ창덕궁 등 주요 궁궐의 서양식 가구와 실내 장식을 자문해 온 최지혜 국민대 겸임 교수 역시 수개월간 고민을 거듭해야 했다.
최 교수는 "매일 새벽 2∼3시까지 미국 의회 도서관에 소장된 옛 신문을 뒤지며 공사관과 관련한 내용을 찾아보느라 다크서클이 턱 밑까지 내려올 정도였다"고 회상했다.
1890년부터 1905년까지 검색된 기사만 해도 672개.
작은 실마리라도 찾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자료를 찾던 중 그의 눈에 들어온 건 1896년 12월 16일 '오마하 데일리 비'(Omaha Daily Bee)라는 지역 신문에 실린 기사였다.
"벽지는 '비비드 그린'(vivid green) 즉, 생동감 있는 녹색에 갈색 커튼이 드리워져 있다는 문장이 있었어요. 그야말로 '유레카!'였습니다 ."(웃음)
그렇게 찾은 녹색은 외부 손님을 맞는 접견실인 객당(客堂), 고종(재위 1863∼1907)의 어진(御眞·왕의 초상화)을 모셨던 정당(正堂)의 벽을 채웠다.
최 교수는 "사진 속 벽지를 찾기 위해 미국의 벽지 전문 회사를 여러 차례 찾았다"며 "국내에서 시도한 재현 프로젝트 중에서는 가장 성공적이라는 평가"라고 작업을 돌아봤다.
현재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미국사무소장으로서 주미대한제국공사관 업무를 담당하는 강임산 소장은 오늘날 공사관이 있기까지 10년 넘게 다양한 실무를 맡아왔다.
강 소장은 "미국 내 한국 관련 건물이 연방정부의 국가사적지로 인정받은 것은 문화유산 행정의 영토를 확장한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그는 현지 동포들의 노력과 지지가 컸다며 공을 돌렸다.
재단에 따르면 일제강점기 당시 미국 내 항일 독립운동가들은 자주독립의 염원을 담은 '워싱턴 대한제국공사관 우편엽서'를 만들었고 서로 사연을 주고받기도 했다.
강 소장은 "공사관은 역사를 잊지 않고 기억하려 한 노력이 쌓여 있는 공간"이라며 많은 관심을 바랐다.
공사관이 미국 현지에서도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은 만큼 앞으로의 활용과 관리 방안을 고민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현재 1·2층은 복원과 재현 공간으로, 3층은 한미 관계사를 설명하는 공간으로 쓰이고 있으나 2018년 5월 개관 이래 전시 내용은 바뀌지 않은 채 그대로다.
내년도 국가유산청과 재단 예산안에는 전시실 단장과 관련한 부분이 포함돼 있지 않다.
최 교수는 그간의 연구 과정, 발굴된 자료 등을 토대로 "조금 더 세부적으로 단장해서 현지 주민들이 한국의 역사·문화를 느낄 수 있는 공간으로 쓰였으면 한다"고 바랐다.
김 교수는 "공사관은 과거의 한 장소가 아니라 오늘날에도 한국을 느낄 수 있는 중요한 장소"라며 "한미 관계의 역사를 발굴하고 새로운 관계를 모색하는 중심 공간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제언했다.
이와 관련, 국가유산청은 "개관 이후 추가로 발굴된 역사 자료를 반영해 전시 내용을 업데이트하고 다양화할 예정"이라며 "현지 활용 사업도 적극적으로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yes@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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