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예, 탈출전문가, 살인자, 테러리스트, 스파이, 연인, 어머니…‘이름 없는 여자의 여덟가지 인생’ [플랫]

플랫팀 기자 2024. 9. 11. 1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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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일본 사람으로 태어나서 북한 사람으로 살았고 이제 남한 사람으로 죽어가고 있지.” 요양원에서 일하는 ‘나’는 노인들을 대상으로 ‘부고 쓰기 프로그램’을 기획한다. 부고를 쓰기 위해 노인들로부터 살아온 이야기를 듣던 중에 거침없고 독특한 캐릭터의 묵 할머니를 만나게 된다. 묵 할머니는 자신이 세 개의 국적을 가졌었다고 말하며, 수수께끼 같은 일곱 개의 단어로 자신의 삶을 설명한다. “노예, 탈출 전문가, 살인자, 테러리스트, 스파이, 연인, 그리고 어머니.”

이미리내 작가의 장편소설 <이름 없는 여자의 여덟 가지 인생>은 일제강점기, 해방, 한국전쟁, 분단으로 이어지는 질곡의 역사를 처절하면서도 강인하게 살아낸 한 여성의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다. 한국인 작가가 한국 근현대사를 배경으로 영어로 쓴 이 작품은 미국에서 먼저 출간되면서 K-문학의 새로운 가능성으로 주목받았다. 미국 대형 출판사 그룹 하퍼콜린스와 억대 선인세 계약을 맺고 이후 영국, 홍콩, 이탈리아, 스페인, 루마니아, 덴마크, 그리스, 호주, 스위스 등 전 세계 10여 개국에서 번역 출간이 확정됐다. 영국 여성문학상 롱리스트(1차 후보) 후보에 오르는 등 전 세계의 독자들로부터 호응을 얻었고, 한국에서는 지난달 번역본으로 출간됐다. 지난달 16일 화상 인터뷰로 만난 이미리내 작가는 “한국 역사를 잘 모르는 외국 독자들이 읽기에 결코 쉬운 책은 아니다. 미국 대형출판사에 팔릴 수 있는 소설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라며 “이 책을 출판하기로 했던 하퍼 출판사 에디터는 이야기가 가진 흡입력에 많이 끌렸다고 하더라. 결국 문학은 국적이나 경계를 넘어 개인의 마음을 움직이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묵 할머니는 일본군 위안부였다가 한국전쟁 때는 성매매 기지를 불태운 테러리스트였고 분단 이후에는 북한에서 스파이로 활동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소설은 시간의 흐름을 뒤섞어가며 한 사람의 인생이라고는 믿기 어려운 삶의 조각들을 퍼즐처럼 하나하나 맞춰나가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순차적이지 않은 흐름에 ‘살인’ ‘스파이’ ‘테러’ 등 미스터리 장르의 요소들이 더해지면서 독자들은 마치 수수께끼를 풀어나가듯 묵 할머니의 인생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그러나 무엇보다 슬프고 참혹한 역사와 작고 연약했던 한 소녀가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기어이 살아남아 어른이 되는 과정은 고통스러우면서도 깊은 여운을 남긴다.

이미리내 작가는 한국 근현대사를 처절하면서도 강인하게 살아낸 한 여성의 이야기를 담은 장편소설 <이름 없는 여자의 여덟 가지 인생>을 펴냈다. 위즈덤하우스 제공

이 작가는 일제강점기 때 태어난 북한에서 살다가 60대에 중국을 통해 남한으로 넘어온 이모할머니로부터 영감을 받아 이 소설을 쓰게 됐다. “막연히 언젠가 책을 쓴다면 이모할머니 인생에서 영감을 받아서 무언가를 써 보고 싶다고 생각을 했어요.” 이모할머니는 거침 없는 이야기꾼이었고, 제도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음에도 지식이 풍부했으며 3개 국어에 능통했다. 당시 시대상으로는 보기 드문 독특한 여성이었다. 소설 속 묵 할머니가 겪은 일들은 이 작가가 자료조사와 취재를 통해 새롭게 써 넣은 것이지만, 누구보다 영민하면서 한국어, 영어, 일본어를 완벽하게 구사하는 캐릭터는 이모할머니로부터 가져왔다.

소설은 묵 할머니의 스파이 활동, 묵 할머니가 남한으로 넘어오게 된 과정, 남한의 수사관이 묵 할머니를 심문하는 장면 등을 긴장감 넘치게 그리면서 잊고 있던 ‘분단’의 역사를 환기시킨다. 여기에는 북한접경지인 파주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아버지가 남·북한 체제경쟁이 치열했던 1960년대 겪었던 일, 할아버지가 대인지뢰를 밟아 다리를 잃어야 했던 사건 등 이 작가의 가족사들도 조금씩 녹아 있다. “분단은 우리에게는 당연한 일처럼 여겨지지만, 외국에서 살아보니 외국인들은 북한의 잦은 군사도발 속에서 불안해서 어떻게 사는지 의아해하더라고요. 생각해보니 저는 이모할머니의 탈북, 할아버지 사고 등을 통해 분단을 생활의 일부라고 생각하고 살았더라고요. 덕분에 내부인의 시선이자 동시에 외국에서 오래 살아온 외부인의 시선으로 분단을 바라보며 쓸 수 있었어요.”

이미리내 작가의 <이름 없는 여자의 여덟 가지 인생>. 위즈덤하우스 제공

소설은 묵 할머니의 인생을 20세기 굵직한 역사의 한복판에 계속 놓아둔다. 그 중에서도 묵 할머니가 어린 시절 인도네시아 스마랑에 끌려가 위안부로 살았던 시절의 이야기, 그 안에서 위안부 여성들끼리 고향을 그리며 우정을 나눴던 대목 등은 참혹하면서 가슴을 아리게 한다. 이 작가 또한 이 부분을 가장 쓰기 힘들었다고 전했다. 이 작가는 “제 2차 세계 대전 때 참전한 여성 생존 군인 수백 명의 증언을 담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가 인생 책 중 하나다. 증언한 이들은 인터뷰하다 고통스러워서 구급차에 실려 가기도 했는데, 그런데도 작가에게 꼭 이야기를 들으러 다시 와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라며 “나도 위안부 이야기를 쓰기 위해 위안부 할머니들의 증언기록을 찾아 들었다. 기억을 끄집어내는 게 고통스러움에도 이분들이 이야기를 나눠주시고 있는데, 내가 쓰기 힘들다고 피하거나 쉽게 가려고 하는 건 작가로서 양심에 위배된다고 생각했다. 최대한 피하지 않고 써야 그분들의 고통이 헛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일각에서는 ‘또 위안부 이야기인가’라고 말한다. 하지만 ‘위안부가 강제로 끌려갔다’라는 역사적 사실조차 말하지 못하는 사람이 방송통신위원장을 맡는 게 지금의 현실이다. 더더욱 계속해서 이야기해야 하는 이유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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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에서 나고 자란 교포 2·3세가 아니라, 한국에서 태어나 20대에야 미국으로 유학을 갔던 저자가 외국어로 소설을 쓰고 현지에서 주목을 받는 일은 이례적이다. 이 작가가 차세대 디아스포라 문학의 새로운 방향으로 주목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 작가는 처음부터 영어로 소설을 쓸 생각은 아니었다고 전했다. “처음 소설을 쓸 때는 당연히 한국말로 썼고, 나름대로 열심히 썼지만 잘 안 됐어요. 그러다가 결혼을 하고 홍콩으로 이주를 했어요. 거기에서 문학 수업을 듣게 됐는데 영어로 쓸 수밖에 없잖아요. 그런데 생각보다 영어로 쓰니 더 반응이 빨리 오더라고요.” 그는 “왜 성인이 될 때까지 사용했던 유일한 언어인 한국어가 아닌 영어가 나에게 조금 더 잘 맞는 문학적 도구인지는 나 자신에게도 미스터리”라고 말했다. 앞으로도 계속 영어로 작품을 쓸 생각이지만, 능력이 된다면 언젠가 한국어로도 작품을 써보고 싶다고 전했다. 차기작으로는 래퍼 넉살의 노래 ‘작은 것들의 신’에서 영감을 받은 중편 소설과, EBS <세상에 나쁜 개는 없다>를 모티브로 한 장편소설을 준비 중이다.

▼ 박송이 기자 psy@khan.co.kr

플랫팀 기자 flat@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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