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모가 언니 '장화'를 죽이자 '홍련'은 아버지를 살해한다...가정폭력 서사의 재해석
뮤지컬 '홍련'
편집자주
공연 칼럼니스트인 박병성이 한국일보 객원기자로 뮤지컬 등 공연 현장의 생생한 이야기를 격주로 연재합니다.
※ 이 기사에는 뮤지컬 '홍련'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고전 속 인물들을 통해 현대 가정폭력 피해자의 구원 서사를 만들어 낸 뮤지컬 '홍련'(배시현 작·박신애 작곡)이 인기를 끌고 있다. CJ문화재단의 창작 뮤지컬 지원 프로그램인 스테이지업에서 개발된 작품으로 쇼케이스 단계부터 현대적 록 콘서트로 풀어낸 형식이 주목을 받았다.
작자·연대 미상의 고전소설 '장화홍련전'의 홍련은 계모의 학대로 희생되는 캐릭터다. 신데렐라, 백설공주, 콩쥐 등 설화나 동화에서 계모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인물이 종종 등장한다. 이들은 무력한 친부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요정이나 왕자, 그리고 홍련의 경우 고을 사또의 도움으로 억울함을 풀고 해피엔딩을 맞는다.
사또, 왕자의 도움만 기다리는 피해자는 거부한다
뮤지컬에서 홍련은 원작 소설과 완전히 다른 인물이다. 호락호락하지 않다. 그는 언니 장화의 죽음이 계모 때문임을 알게 되자 의붓동생 장쇠의 팔다리를 작살내고 아버지를 살해한다. 요정이나 사또의 도움 없이 억울함을 스스로 푸는 주체적 인물인 것이다. 천도법정의 저승신 바리 앞에서도 자신의 죄를 당당히 고백하며 재판을 끝내라고 한다.
그런데 무언가 이상하다. 아버지의 잘못이 크고 계모에게 친자식 장쇠가 중요한 존재이겠으나, 홍련은 왜 폭력의 주체인 계모는 놔두고 아버지와 동생을 죽인 것일까. 또한 열여섯 살의 어린 소녀 홍련이 어떻게 건장한 아버지와 혈기왕성한 남동생을 무참하게 살해할 수 있었을까. 게다가 마을 사람들은 홍련이 장화를 따라 자살했다고 알고 있다. 저승 법정에서 스스로에게 불리한 진술을 하는 홍련의 말은 극이 진행될수록 신빙성이 떨어지고, 홍련의 삐딱하고 거침없는 태도는 허세이자 방어기제였음을 알게 된다.
록 콘서트와 씻김굿을 한 무대에 구현
뮤지컬의 홍련은 원작 소설과 다르지 않은, 심지어 더 무력한 존재였다. 장화는 홍련을 보호하려고 했으나, 홍련은 계모에게 함께 벌을 받는 게 두려워 언니를 외면했다. 계모의 괴롭힘으로 장화가 죽자 홍련의 죄책감은 극에 달했고 결국 자살했다. 전반부의 전개는 홍련의 영혼이 저승 법정에서 만들어 낸 환상을 재연한 것이다.
뮤지컬 '홍련'에는 또 다른 설화의 인물 바리공주도 등장한다. 설화 속 바리공주는 아버지에게 딸이라는 이유로 버림받지만 죽어가는 아버지를 위해 저승에서 온갖 고난을 겪고 서천꽃을 가져다가 아버지를 살린다. 뉘우친 아버지가 바리공주에게 재산을 남기려 하지만 이를 모두 거부하고 저승에서 불쌍한 영혼을 구제하는 신이 된다. 흔히 바리공주를 우리나라 최초의 무당으로 여긴다.
뮤지컬의 바리는 홍련과 연결돼 있다. 가정폭력의 피해자인 홍련은 죄책감에 시달리다 도피적이고 자기보호적인 환상을 만들어냈다. 바리는 법정극을 통해 홍련의 넋이 사실을 자각하고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바란다. 홍련은 현실을 자각하는 순간 고통과 죄의식 때문에 다시 환상 속으로 숨어드는 과정을 되풀이한다. 바리는 홍련을 포기하지 못하고 이런 과정을 수천, 수만 번 되풀이한다.
'홍련'은 홍련의 한과 고통을 풀어낸 씻김굿이다. 바리가 어떻게 끊임없는 순환의 고리를 끊고 마침내 홍련의 한을 풀어내는지를 설득력 있게 제시하지는 못한다. 그럼에도 홍련이 상처를 씻어내는 과정은 연극적으로 잘 표현된다. 무대 중앙에 스탠드 마이크를 놓고 강렬한 음악으로 록 콘서트처럼 구성해 울분을 시원하게 쏟아내게 한다. 그리고 말 그대로 씻김굿 한판을 벌여 홍련의 한을 풀어낸다.
'홍련'은 이질적 요소인 록 콘서트와 씻김굿을 한 무대에서 구현하고 고전 설화의 인물을 연결시켜 가정폭력 희생양 구원 서사를 완성한다. 무엇보다 젊은 뮤지컬 관객을 겨냥한 작품에서 씻김굿을 과감하게 재현한 선택이 놀랍다. 다만 상처받은 여성 연대의 서사를 강조하다 보니 홍련의 아버지가 맹목적인 악역으로 설정된 것은 설득력이 약하다. 그럼에도 뮤지컬 '홍련'은 고전 설화를 현대적으로 재구성해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데 성공한 작품으로 주목해도 좋다. 10월 20일까지 서울 대학로 자유극장에서 공연한다.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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