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가 국정원 ‘패싱’하고 박지원에 남북정상회담 다리 놓은 이유

박찬수 기자 2024. 9. 11. 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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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수의 DJ 국정노트 (33)
2000년 1월 정몽헌, 박지원에게 ‘회담 가능하다’
박지원 보고받은 DJ “극비리에 추진하라” 지시
국정노트에 담긴 실용주의 “욕심 안내고 차분히
만나는 것만으로 성과…평화선언 있기를 기대”
평양 내린 DJ, 김정일 보지 않고 먼 산만 바라봐
“북한 땅을 직접 보니까 눈물 쏟아질 것 같았다”
2000년 6월13일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한 김대중 대통령이 직접 마중 나온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두 손을 맞잡고 환하게 웃고 있다. 평양/청와대사진기자단

2000년 6월13일 오전, 평양의 하늘은 구름이 조금 끼었지만 청명했다. 분단 이후 55년 만에 처음으로 대한민국 대통령을 태운 전용기가 순안공항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전용기 문이 열리고 김대중 대통령이 트랩에 모습을 드러냈다. 저 멀리서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김 대통령은 트랩에서 북녘 하늘을 바라봤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주변 사람들에겐 길게만 느껴졌다. 임동원 당시 국정원장은 “김정일 위원장이 걸어오는데 눈길을 주지 않고 왜 다른 곳을 응시하시나, 조금 애가 탔다”고 말했다. 김 대통령은 훗날 육성 회고록에서 “비행기 출구를 나와서 먼 산을 바라보는데 눈물이 쏟아지려고 했다. 분단과 전쟁으로 올 수 없던 북한 땅을 이렇게 직접 보게 되었다는 사실, 대통령으로서 첫 정상회담을 하기 위해 북한에 왔다는 사실을 생각하니 만감이 교차하면서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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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 위원장이 공항에 마중 나온 것도 파격이지만, 그가 김 대통령이 탄 차량 바로 옆자리에 동승해 숙소인 백화원 영빈관까지 이동한 건 모든 이를 깜짝 놀라게 했다. 김 대통령은 아내인 이희호 여사 자리에 김 위원장이 타자, 처음엔 놀랐지만 반가웠다고 자서전에 썼다. 차량에서 두 정상이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는 두고두고 관심거리였다. 하지만 대화는 거의 없었다고 한다. 김 대통령은 나중에 “사전에 (정상회담) 의제에 대해 합의한 게 없었고 상당히 긴장한 상태였기에 쉽게 대화하기 어려웠다. 또 (거리에 환영나온) 평양시민들의 환호 소리가 너무 커서 물리적으로 대화하는 게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저 사람들이 모두 자발적으로 나온 겁니다’라는 김 위원장 말만 들을 수 있었다”고 밝혔다. 역사적인 남한 대통령의 첫 북한 방문은 이렇게 시작됐다. 1998년 2월25일 대통령 취임사에서 밝힌 “북한이 원한다면 정상회담을 할 용의가 있다”는 제안이 실현되는 순간이었다.

남북정상회담을 향한 김대중의 노력은 대통령이 되기 훨씬 전부터 시작됐다. 디제이(DJ)는 야당 총재 시절부터 ‘오랜 적대 관계가 지속돼온 남북한 사이엔 정상 간 회담을 통해서 문제를 풀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합의라도 지켜지기 힘들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고 임동원씨(김대중 정부에서 국정원장과 통일부 장관을 지냈다)는 밝혔다. 임동원 전 국정원장은 “디제이는 대통령 되기 전부터 민족 문제를 북한 최고 지도자와 만나서 의논하겠다는 생각을 늘 갖고 있었다. 집권 이후 그런 생각은 ‘햇볕정책’으로 가시화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나그네의 외투를 벗기는 건 강한 바람이 아니라 따뜻한 햇볕’이라는 이솝 우화에서 따온 햇볕정책은 김대중 집권 초기엔 북한의 화답을 끌어내지 못했다. 북한은 남북 교류·협력을 추구하는 햇볕정책이 자기 체제를 안에서부터 약화시켜 흡수통일하려는 의도라고 의심했다. 김 대통령은 육성 회고록에서 “처음엔 (북한이) 상당한 경계심을 보였다. 지난 정부에서 북한붕괴론을 내세우면서 압박했기 때문에 우리에 대한 경계심이 매우 강했다”고 밝혔다.

이런 경계심에 물꼬를 튼 건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었다. 정 명예회장은 1998년 6월과 10월 두 차례에 걸쳐 소 떼 1001마리를 몰고 판문점을 넘어 북한을 방문했다. 현대와 북한의 금강산 관광사업 계약으로, 그해 11월엔 사상 처음으로 남한 주민을 태운 유람선이 금강산에 도착했다. 정주영 명예회장은 방북 때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직접 만날 정도로 신뢰를 쌓았다. 다른 기업들이 투자 안전성을 우려해 소극적일 때 오직 현대만이 대북 사업에 적극 뛰어들었고, 이것이 6·15 남북정상회담의 가교 역할을 했다.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 그리고 양쪽 대표단이 2000년 6월15일 백화원 영빈관 1호각에서 열린 환송 오찬에서 박지원 문화관광부 장관의 제의로 손에 손을 잡고 ‘우리의 소원’을 합창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킨 실무 핵심은 임동원 당시 국정원장과 박지원 당시 문화관광부 장관이었다. 박지원 장관은 북한과의 비밀 협상을 주도했고, 임동원 원장은 정상회담의 내용을 채우는 역할을 했다.

2000년 1월 박지원 문화관광부 장관(현재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은 서울 플라자호텔 스카이라운지에서 열린 어느 모임에서 정몽헌 현대그룹 회장을 만났다. 이 자리에서 박 장관은 귀가 번쩍 뜨이는 얘기를 정 회장한테서 들었다고 말했다. “그날 정 회장이 나한테 ‘남북정상회담이 가능합니다’라고 말했다. 다음날 곧바로 청와대에 들어가 김대중 대통령과 식사하면서 그 얘기를 했다. 디제이는 ‘현대를 통하면 가능할 수 있을 거다. 극비리에 추진해 보라’고 하셨다. 그런데 하루는 임동원 국정원장이 롯데호텔에서 나를 만나자고 하더라. 사람 좋은 임 원장이 ‘어떻게 그럴 수 있나. 남북정상회담을 국정원장인 나를 패싱하고 몰래 추진할 수 있느냐’고 무척 화를 내셨다. 김 대통령이 임 원장을 불러 ‘국정원은 남북정상회담 추진 소식을 알고 있느냐. 국정원이 박 장관을 도와서 꼭 성사시키라’고 지시했다는 거였다. 임 원장에게 정말 미안했다.” (박지원 장관)

현대는 대북 사업을 도와주던 재일동포 2세 요시다 다케시를 통해, 북한이 정상회담에 긍정적이라는 판단을 갖고 있었다. 정몽헌 회장이 이 사실을 박 장관에게 말한 건, 북쪽에서 김 대통령의 최측근 인사와 접촉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북한은 대북 공작을 해온 국정원이 정상회담 준비에 참여하는 걸 싫어했다고 나중에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임동원 원장에게 직접 밝힌다.

박지원 장관의 첫 보고 이후 우리 정보기관은 일본에서 요시다가 북한과 정상회담 추진에 관해 협의하는 구체적인 정황을 포착하고, 성사 가능성이 크다는 판단을 내렸다. 2000년 3월10일 싱가포르에서 남북간 첫 비밀 접촉이 열렸다. 남쪽에서 박지원 문화관광부 장관이, 북쪽에선 송호경 아태평화위 부위원장이 나섰다. 김 대통령은 박지원에게 비밀 협상을 맡긴 이유를 “북한이 대통령의 최측근 인사와 대화하길 원했다. 박 장관은 나의 최측근으로 일을 잘하기 때문에 특사 업무도 잘할 것이라고 판단했다”고 육성 회고록에서 밝혔다.

극비 접촉을 숨기려 박 장관은 부처 간부들에게 “건강이 좋지 않아 외국에 치료받으러 간다. 절대 외부에 알리지 말라”고 지시했다. 싱가포르에서 박 장관은 김 대통령의 베를린 선언문을 송호경 부위원장에게 전달하면서 디제이의 의지를 강조했다. ‘우리는 북한이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줄 준비가 되어 있다. 남북기본합의서 이행을 위한 당국간 대화에 적극 나서길 촉구한다’는 내용이었다. 박 장관의 얘기다. “첫날 접촉이 끝나고 송호경이 일어서면서 ‘내일 다시 만납시다. 마치 김대중 대통령의 음성을 듣는 것 같습니다’라고 말하더라. 그때 ‘아, 정상회담이 가능하겠구나!’ 생각이 들었다. 다음날 만나서 최종 합의를 하자고 하니까 송호경이 ‘이번엔 위대한 장군님이 국방위원회 승인 없이 독자적으로 결정해서 우릴 보낸 겁니다. 그러니 이건 어떤 일이 있어도 비밀로 하고, 다음에 1차 실무회담을 다시 엽시다’라고 말했다.”

1주일 뒤인 3월17일 중국 상하이에서 박지원 장관과 송호경 부위원장의 제1차 특사회담이 열렸다. 3차례 특사회담을 거쳐 남북은 4월8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요청에 따라 김대중 대통령이 6월12일부터 14일까지 평양을 방문한다. 평양 방문에서는 김 대통령과 김 국방위원장 사이에 역사적인 상봉이 있게 될 예정이며 남북정상회담이 개최될 것이다”라는 내용의 공동발표문에 최종 합의했다. 분단 이후 55년 만에 남북 정상이 만난다는 엄청난 뉴스는 월요일인 4월10일 아침 서울과 평양에서 동시에 발표됐다. 다음날인 4월11일 김대중 대통령의 국정노트엔 ‘4·8 남북정상회담 합의에의 소회’란 제목의 메모가 적혀 있다. 역사적인 남북간 합의를 대하는 대통령의 마음과 자세가 여기 고스란히 담겨 있다.

2000년 4월11일 김대중 대통령이 국정노트에 쓴 남북정상회담 개최에 대한 소회. 역사적인 남북 정상간 만남이 박정희 정부의 7·4 공동성명, 노태우 정부의 남북기본합의서 연장선상에 있음을 밝히고 있다.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4·8 남북정상회담 합의에의 소회> 00.4.11

1. 반세기만의 민족적 경사, 일생을 뜨거운 눈물 불금(不禁·금할 수 없다는 뜻)

2. 이러한 성과는 1300년 통일국가 지킨 조상의 음덕

3. 분단 이래 한반도에서 평화와 통일 위해 몸 바친 0000 모든 영령들의 00

4. 당면해서는 지난 2년 동안 햇볕정책 지지해준 국민과 미·일·중·러 등 세계여론의 성원의 덕

5. 무엇보다 떳떳한 것은 우리 민족의 문제를 우리가 자주적으로 합의한 것

6. 정상회담 - 7·4 공동성명(자주·평화·민족대단결), 남북합의서(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 실현을 원칙으로)

7. 베를린 선언에서 천명한 ① 정부간의 경제협력 ② 화해와 협력 ③ 이산가족의 재결합 ④ 남북 당국간의 대화

8. 민족 대사 - 초당적이고 범국민적 협력을. 선거 후 각계 의견

9. 국무위원 - 역사적 대업 참여의 긍지 속에 만반 준비를

10. 나, 모든 정성과 노력 바쳐 성공시켜 국민과 민족에 보답

디제이는 정상회담 합의가 ‘1300년 통일국가 지킨 조상의 음덕’이라고 밝혔다. 남북이 하나의 민족국가를 이어왔고 지금의 분단은 일시적 현상이라는 생각을 강하게 드러내는 대목이다. 또 이번 합의가 박정희 정권의 7·4 남북 공동성명, 노태우 정권의 남북기본합의서 채택의 연장선상에 있음을 강조했다. 김대중 대통령의 국정노트를 읽다 보면, 정책 성공이 자신만의 공이 아니라 역대 정부의 성과 위에 서 있다고 밝히는 대목이 여럿 나온다. 김대중은 보수 권위주의 정권과 심지어 군사독재도 나름 긍정적 측면을 갖고 있었고, 그런 모습이 남북관계 개선에 일정 정도 기여했다는 ‘연속성’의 잣대로 국정을 바라봤다.

현시기 윤석열 정권에서 안타까운 점이 바로 이 부분이다. 날이 갈수록 윤 대통령이 극우로 치닫는 건, 전임 문재인 정권의 국정운영 방향과 패턴을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부정하려다 보니까 생기는 당연한 귀결이다. 반면에 김대중 대통령은 정책 성공을 위해선 과거 권위주의 정권의 시도를 평가하고 이어받는 걸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를 통해서 보수 세력의 반발과 의구심을 누그러뜨렸다. 현직 대통령에게 필요한 건, 추진하는 정책의 성공이지 차별화가 아니다. 어떤 정책이든 하늘에서 뚝 떨어지듯 갑자기 생겨나진 않는다. 이전 정권에서 비슷한 검토와 추진을 했던 경험을 잘 활용하면, 좀 더 현실적인 성과를 거두고 반대파의 협조를 얻어낼 수 있다. 김대중 대통령은 이걸 잘 활용했다고 말할 수 있다.

2000년 4월26일 김대중 대통령이 중앙 언론사 사장단 만찬을 앞두고 작성한 국정노트. 남북정상회담 준비를 위해 김 대통령은 언론계·학계를 비롯한 각계 주요 인사들을 만나 의견을 들었다.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 중앙언론사 사장단 만찬 > 00.4.26

1. 노고 치하, 성원 감사 2. 총선 민의 - 겸허히 수용, 순리의 정치 3. 여야 협력으로 새 정치, 개혁의 지속 4. 겸양과 의연의 겸비 속에 3년의 임기 성공적으로 시정 5. 여러분의 협력 절실 6. 남북정상회담에 대해서 ① 55년 만의 민족의 대경사 ② 만나는 것만으로도 성공 - 평화와 협력에의 물꼬 ③ 통일보다 냉전 종식 - 평화선언 있기를 ④ 베를린 선언의 영향 ⑤ 북이 응한 이유 - 신뢰, 경제사정, 국제적 압력, 김정일의 자신 ⑥ 욕심 안 내고 차분히 - 베를린 4대 원칙(경제공동체, 평화공존, 이산가족, 상설기구) 7. 언론의 성숙된 보도. 한 번도 성공한 대통령 없었다. 역사 만들게 도와달라

김 대통령은 남북정상회담 성과에 너무 큰 기대를 갖지 말자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기대를 하지 말자는 게 아니라, 현실적으로 접근해서 이룰 수 있는 것을 이루자는 뜻이었다. 4월26일 중앙 언론사 사장단과의 청와대 만찬을 앞두고 작성한 국정노트에, 김 대통령은 “만나는 것만으로도 성공이다. 이것만으로 평화와 협력의 물꼬를 트는 것”이라고 썼다. 또 “통일보다 냉전 종식·평화 선언이 있어야 한다”고 밝혔다. 궁극적 목표는 통일이지만 이건 먼 훗날의 얘기고, 우선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통해서 전쟁 위험성을 제거하는 데 초점을 맞추겠다는 의미다. 또 하나의 포인트는 실용주의다. 실사구시의 접근을 하겠다, 냉철하게 현실을 보면서 남북 모두에 이익이 되는 방식으로 정상회담을 추진하겠다는 생각이 국정노트엔 강하게 드러난다. 임을출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는 “실용주의는 지금도 여전히 의미 있는 대북 접근 방식”이라고 평가했다.

임을출 교수는 “특히 ‘통일보다 냉전 종식, 평화 선언이 우선’이라는 메시지가 주는 울림이 있다. 지금을 ‘신냉전’이라 부르는데, 동북아에서 미국과 중국이 전략적 경쟁·대립을 하는 한 우리가 통일을 논의할 수 있는 공간은 현실적으로 없다. 그래서 남북간의 점진적인 신뢰 구축을 통한 평화공존이 필요했고, 미·중·러·일 등 주변국의 대립을 완화해서 평화 선언을 먼저 하자고 했다. 디제이는 이미 그때 그런 판단을 했던 거다. 얼마 전 윤석열 대통령이 광복절 경축사에서 강조한, 사실상의 흡수통일인 ‘자유 통일’과 한·미·일 군사협력 강화는 평화 정착과 정반대로 간다는 점에서 걱정스럽다”고 말했다.

<다시 보는 DJ 국정노트>

1. 빌 게이츠 조언 구한 DJ, 세계가 놀란 초고속인터넷 깔다

2. 문화를 산업으로 본 첫 대통령…DJ, ‘한류’ 기반을 놓다

3. “책임 통감한다” 국민에 고개 숙일 줄 알았던 대통령

※ 다음 주는 추석 연휴라 ‘DJ의 국정노트’ 연재를 쉽니다.

박찬수 대기자 pc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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