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승조의 아트홀릭] "진본 국보와 보물, 간송을 담는 소박한 그릇"
■ 글: 정승조 아나운서 ■
'간송을 담는 소박한 그릇'이 되고자 9월 새롭게 문을 연 미술관이 있습니다.
간송 전형필 선생의 정신과 소장품을 넉넉히 담아 많은 분들이 누리게 될 곳인데요.
바로 간송미술관의 첫 지역 분관인 '대구간송미술관'입니다.
요즘 이곳에 미술 애호가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습니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개관일인 지난 3일 방문객은 2천 2백여 명.
지난 7일엔 3천 5백여 명이 대구 간송미술관을 찾았습니다.
오는 22일까지 관람권 1차 판매분 예매율도 50%를 넘었다고 하는데요.
이에 맞춰 선보이는 개관전엔 신윤복의 '미인도', '훈민정음' 해례본 진본 등 국보(國寶)와 보물(寶物) 97점을 담았습니다.
역대 최대 규모의 '간송 컬렉션'입니다.
'정승조의 아트홀릭'은 대구간송미술관 개관기념 국보·보물전 '여세동보(與世同寶) - 세상 함께 보배 삼아'를 기획한 '허용 대구간송미술관 전시교육팀장'을 만났습니다.
▮ 9월 초 개관한 대구간송미술관이 화제입니다.
9월 2일에 개관식을 갖고 3일부터 일반 시민들을 맞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개관 기념 국보·보물전이 성황리에 개최되고 있는데요. 개관하고 첫 토요일인 지난 7일에는 3,500명이 넘는 분들이 다녀가셨습니다. 대구간송미술관의 개관과 첫 전시에 많은 관심과 호응을 보여주신 분들께 정말 감사드립니다.
▮ 개관 소식에 "왜 대구인가?"라는 질문을 자주 받으셨을 듯합니다.
간송미술관이 지역 분관을 고민하기 시작한 것은 꽤 오래전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동안 여러 제안이나 후보지들이 있었지만 결국 10여 년의 준비 과정을 거쳐 대구에 첫 분관이 만들어지게 되었습니다.
“왜 대구인가?”라는 질문을 많이 받게 되는데요.
그 이유는 무엇보다 ‘문화보국(文化保國)’이라는 간송미술관의 설립 이념이 대구의 역사나 지역성과 잘 부합했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잘 아시다시피 대구는 일제강점기 국채보상운동과 3.1운동의 중심지였습니다.
국내 유일의 독립유공자 전용 국립묘지인 신암선열공원이 대구에 있을 정도로 민족정신과 애국의 역사가 깊은 곳이지요. 또한 대구는 우리나라 근대미술의 발상지이기도 합니다. 지금도 대한민국 3대 아트페어 중 하나인 'Diaf(Daegu International Art Fair)'를 비롯해서 국제뮤지컬페스티벌 등 다양한 문화예술행사가 개최되는 명실상부한 문화예술의 도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역사적 전통을 시작으로 문화예술에 대한 수요의 측면에서 갖춘 탄탄한 인프라가 간송미술관의 첫 번째 지역 분관을 유치하게 된 힘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2015년 협약 체결을 시작으로 10여 년 동안의 준비 과정에서 때로는 신중하게, 때로는 적극적이고 속도감 있게 지원과 협력을 아끼지 않았던 대구시청과 관계자들의 노력도 큰 역할을 했다고 봅니다. 무엇보다 그 바탕에는 대구시민들의 관심과 애정이 있었겠지요.
▮ 2020년엔 미술관 건축을 위한 국제 공모도 진행했습니다. 대구간송미술관은 무엇을 표현하고자 했습니까.
미술관 건축은 국제 공모를 거쳐 연세대 최문규 교수님의 안이 채택되었습니다. 지난 2일 미술관 개관식 때 교수님도 참석하셔서 기자들의 질문에 대답해 주시기도 했지요. 그때 말씀하셨던 내용 중에 저의 기억에 남는 표현이 있습니다.
“간송을 담는 소박한 그릇”이 그것입니다.
그 표현대로 미술관은 화려하거나 과장되지 않지만 간송의 정신과 소장품을 넉넉히 담아내고 있습니다. 밖에서 보거나 안에서 걸어보아도 잔잔하고 담담한 모습에,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정이 들게 되는 건축물인 것 같습니다.
▮ 그렇군요.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신다면요.
산자락 경사지에 건축된 미술관은 지형을 거스르지 않고 경사진 지형 위에 차분히 얹혀 있습니다. 새로운 풍경을 만드는 게 아니라 풍경의 일부가 되고 풍경을 누리게 만드는 건축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건축 디자인 측면에서 눈에 띄는 것은 넓은 박석마당과 11개의 아름드리 나무기둥입니다.
두 요소는 미술관을 열린 공간으로 만드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미술관에 들어가지 않아도 미술관을 누릴 수 있게 만들지요. 커다란 나무기둥을 지나 넓게 자리 잡은 박석마당에 서면 멀리 팔공산을 비롯해 대구를 감싸고 있는 여러 산들의 능선이 시원하게 펼쳐진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미술관 문화행사 공간으로도 사용할 예정이지만, 그런 때가 아니더라도 늦은 밤만 아니면 언제든 찾아 풍경을 즐길 수 있는 열려있는 공간입니다.
▮ 개관전 이야기로 넘어가보죠. 역대 최대 규모의 국보와 보물을 만날 수 있다고요?
미술관이 개관을 하고 처음 시민들을 만나게 되는 전시에 어떤 작품들을 선보일까 많은 고민이 있었습니다. 간송미술관 최초의 상설전시관이니 간송의 많은 유물들 중 대표작만을 모아 보여드리자는 결정은 비교적 어렵지 않게 내려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결정의 결과물은 만만치 않은 위용을 자랑합니다. 개관전에 전시되는 97점의 작품들은 모두 국보와 보물, 즉 국가적 유산들이니까요. 관람객들 중에는 반신반의하며 진짜 이 작품들이 진짜냐고 묻는 분들이 있습니다. 진짜입니다. 100% 진본 국보와 보물입니다. 그 보배들을 많은 분과 함께 누리자는 취지로 개관전의 제목은 ‘여세동보(與世同寶)-세상 함께 보배 삼아’로 정했습니다.
사실 이 문구는 1938년 간송미술관이 설립될 당시 정초석에 새겨진 글에서 따왔습니다. 간송 전형필 선생이 모은 작품들을 세상과 함께 보배 삼아 자손 대대로 보전하자는 뜻으로 간송의 스승이었던 위창 오세창 선생님이 지은 글입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한 전시에 이렇게 많은 국보와 보물이 나온 적은 미술관 역사에 없던 일입니다. '훈민정음' 해례본이 서울을 벗어나 전시된 것도 처음 있는 일이고요. 출품된 작품의 종류도 회화, 서예, 전적, 도자, 불상 등 다양합니다.
그래서 4개의 전시실에 나눠 소개하고 있습니다. 전시에 출품된 작품뿐만 아니라 소개되지 않은 회화 50여 점을 소재로 만든 실감 영상도 별도의 전시실에서 상영되고 있습니다. 약 38미터의 반원형 스크린에서 보는 영상이 특별한 경험을 제공하리라고 봅니다. 마지막으로 간송 선생의 삶을 수장가로서의 면모뿐만 아니라 교육자, 예술가, 연구자 등 다양한 측면에서 조명하는 ‘간송의 방’도 별도 전시실로 꾸며져 있습니다.
▮ 신윤복의 '미인도'는 특별한 방식으로 감상할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미인도' 전시는 소수의 인원이 독대하듯 관람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의도에서 출발했습니다.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있기에 애초의 기획 의도가 완벽하게 구현되지는 못했습니다. 간송미술관에 와서 '미인도'를 못 보고 간다면 몹시 서운하실 테니까요. 하지만 여러 작품 속에 섞여 있지 않고 하나의 전시실에 하나의 작품만 전시되는 방식은 유지하였습니다. 많은 설명이나 보조적인 연출 없이 작품을 온전히 감상할 수 있도록 배려했고요. 하나의 공간, 공간에 어울리는 조명, 작품과 어울리는 배경음악, 그리고 최소한의 설명. 이것이 '미인도' 전시의 핵심입니다. 덕분에 관람 인원에 제한이 생겨 대기하는 줄이 길어진 점에는 넓은 이해를 부탁드리고 있습니다.
▮ 국보(國寶)이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록된 '훈민정음' 해례본 진본도 기대됩니다.
'훈민정음' 해례본 역시 별도의 전시실에 한 점만 전시되고 있습니다. "이게 진짜예요?"라는 질문을 가장 많이 받는 전시실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진짜입니다. (웃음) 약 80년 전 안동의 한 고가(古家)에서 발견되어 간송 선생이 사들인 뒤 다시 고향을 찾게 되었다는 의의도 크고, 한국전쟁 중에도 간송 선생의 품에서 떠나지 않았던 해례본이 서울을 벗어나 전시된 것도 처음 있는 일이라 더욱 뜻깊은 전시입니다.
특히 이번 전시에서는 해례본에 담긴 세종대왕의 애민 정신을 특별한 방식으로 재조명하였습니다. 세종은 글자를 몰라 뜻을 펼치지 못하는 백성들을 위해 훈민정음을 창제하셨습니다. 그런 임금이 21세기에 다시 태어난다면 과연 어떤 사람들에게 마음을 쓰셨을까요? 아마도 당신이 만든 쉽고 편한 한글을 편히 쓰지 못하는 시각장애인은 아니었을까 합니다.
‘소리로 만든 집’이라는 전시 제목은 이런 생각에서 출발했습니다.
비시각적 요소를 활용한 작품을 꾸준히 창작해 왔던 송예슬 작가가 그런 기획에 동참해 주셨고, 전시실에서는 해례본을 낭독하는 여러 시민의 목소리가 마치 합창을 하는 것처럼 들려집니다. '훈민정음' 해례본이 세종의 애민정신을 시각적으로 대변하는 유물이라면, 송예슬 작가의 작업은 청각적으로 구현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이 외에도 주목할 만한 작품을 꼽아달라는 부탁엔 "우열을 가리기 정말 힘들다"라고 말씀하셨어요?
작품 하나하나가 모두 보물이라는 게 이번 전시의 취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하나를 꼭 집어 말씀드리기는 몹시 어렵습니다. 정말 우열을 가리기가 힘듭니다. 전시를 준비한 사람으로서는 장르별 대표작을 꼽을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회화에서는 정선의 '풍악내산총람'을 추천합니다. 세밀함과 탄탄한 구성력 등 조선후기 회화의 거장으로서 정선이 지닌 실력이 유감없이 발휘된 작품입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더 재미있고, 찬찬히 감상하면 감탄이 나오는 작품입니다.
도자에서는 교과서에 나올 정도로 유명한 '청자상감운학문매병'을 빼놓을 수 없을 겁니다. 화려하고 세심한 문양, 우아하고 기품 있는 기형(器形)이 고려청자를 대표하는 작품답게 아름답습니다.
▮ 기대가 됩니다. 또 다른 대표작으로 무엇이 떠오르십니까?
서예에서는 추사 김정희가 세상을 떠난 해에 쓴 '대팽고회'를 추천합니다. 기교와 장식을 모두 덜어내고 마치 천진한 자연의 상태로 들어선 듯한 글씨입니다. 그 와중에서도 느낄 수 있는 글씨의 힘과 글에 담긴 뜻을 곱씹다 보면 ‘역시 거장답다’라는 감탄이 나오게 됩니다.
불교 미술품 중에서는 '계미명금동삼존불입상'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불상의 뒤쪽에 계미년, 즉 563년에 만들었다는 글이 새겨져 있어 우리나라 불상의 기준작이 되는 중요한 작품입니다. 그리고 부처님의 미소나 1,500년의 세월을 곱씹다 보면 문득 아득해지는 느낌이 들지요.
이렇게 말하고 나니 신윤복의 '혜원전신첩'이나 김홍도의 '마상청앵', 이정의 '삼청첩'을 추천하지 못한 게 마음에 걸립니다. 그런 명작들을 무심히 넘어가려 했다니 죄를 지은 것 같네요. (웃음) 전시된 모든 작품이 국보와 보물이니만큼 들여다보면 들여다볼수록 매력적이고 감탄스럽다는 말씀으로 변론을 마치겠습니다.
▮ 마지막으로 대구간송미술관 앞으로 어떤 미술관이 되길 바라는지, 또 아트홀릭 독자들께 전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부탁드립니다.
간송미술관의 첫 번째 상설전시 공간이 대구간송미술관입니다.
간송 선생이 지켜온 문화유산을 모두 함께 누리고 보전하자는 뜻이 본격적으로 실현되는 계기이기도 합니다. 그동안 전형필 선생을 시작으로 어렵고 척박한 환경 속에서 세상이 알아주지 않고 남들의 인정받지 못해도 묵묵히 간송의 소장품을 지키고 연구하고 전시했던 간송미술관의 많은 선생님들의 뜻이 담긴 공간이기도 합니다.
이건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대구간송미술관은 화려하거나 기발하거나 혁신적인 미술관을 지향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미술관은 화려하고 기발하고 혁신적인 영감의 원천을 보여주는 공간입니다. 아트홀릭 독자를 비롯해 여러분들은 앞으로 대구간송미술관이 꾸준히 선보일 우리 문화유산을 통해 일상을 변화시킬 상상력, 그리고 변하지 않아야 할 가치를 되새기는 시간을 갖길 바랍니다. 그게 미술관을 찾는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 대구간송미술관 개관기념 국보·보물전 '여세동보(與世同寶) - 세상 함께 보배 삼아'
- 장소 : 대구간송미술관
- 일정 : 9월3일(화) ~ 12월1일(일)
- 관람료 : 유료 (공휴일 제외한 매주 월요일, 추석 당일 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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