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드폰의 시대, 새로운 귀를 장착하다 [김성영의 sound nomad]

2024. 9. 11.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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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미국 보스턴 버클리 음대에서 있었던 헤드폰 콘서트. 참가자들이 공연의 마지막 곡을 헤드폰으로만 감상하고 있다. [버클리음대 홈페이지]

호모 헤드포니쿠스 (Homo Headphonicus). 헤드폰 인류의 시대다. 다소 우스꽝스러운 표현이나 언제 어디서든 헤드폰과 동행하는 수많은 이들을 보면 오히려 작금의 현실을 제대로 반영한 표현이다.

사실 헤드폰(이어폰을 포함해 귀에 직접적으로 소리를 재생하는 모든 음향장비를 포함)의 역사는 그리 긴 편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모 헤드포니쿠스의 시대는 어떻게 도래하게 된 것일까.

축음기를 발명한 에디슨은 이 기계가 문서를 구술시키는 용도로 사용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음악에 대한 대중의 열망이 축음기의 주 목적을 음악 기록용으로 전환시켰다. 발명가 자신조차도 축음기가 녹음과 재생을 위한 수단으로 보급돼 음악의 상품화를 재촉한 역사적 발명품이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2차 대전 중 독일 군은 히틀러의 위치를 숨기기 위한 전략이 필요했다. 그들은 휴대가 간편한 테이프에 자기력으로 소리를 녹음하는 기술을 개발해 독일 곳곳에서 그의 연설을 송출했고 이후 이 기술은 음악산업까지 유입돼 소리를 녹음하고 재생하는 방식이 방송을 포함한 모든 음악산업의 기준으로 자리잡게 됐다.

필자 또한 방송국 엔지니어로서 커리어를 시작하며 위와 같이 테이프를 편집하는 물리적 기술을 가장 먼저 배웠다. 손기술에 대한 자부심이 담긴 선배들의 ‘라떼’의 향연을 들으며 다같이 면도날과 접착테이프를 이용해 직접 테이프를 자르고 이어 붙이곤 했다. 다소 올드한 방식처럼 들리나 그 품질은 현재의 디지털 편집 방식과 비교해도 손색 없을 만큼 훌륭했다. 참으로 낭만적이지 않은가. 빠른 편집에 목 매는 효율 중심의 현재와 달리 오로지 한 편의 에피소드를 위해 여럿이 머릴 맞대고 작업하던 추억을 떠올리면 말이다.

녹음과 재생 방식은 기술적 경쟁을 거듭하며 빠르게 진화했다. 낭만의 시대를 함께했던 녹음기들은 벌써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컴퓨터 한 대로 녹음과 편집, 송출까지 모든 프로세스를 완료할 수 있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소리를 최종 단에서 재생하는 방식과 장비는 2차 대전 시기와 크게 다를 것이 없다. 자석의 자기력으로 코일을 움직이는 방식의 스피커가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 굳이 변화가 있다면 스피커의 크기가 작아지고 있다는 점이랄까. 여느 가정집 소파 앞을 장식했던 소위 말하는 ‘전축’ 스피커는 거의 사라졌다. 다른 가구들에 치이거나 층간 소음 문제 등 다양한 이유로 밀려난 전축 스피커는 이제 마니아의 산물이 됐다. 혹은 카페에서 볼 수 있는 럭셔리한 인테리어 가구로 사용되는 게 전부인 듯하다. (카페에서 사람들이 떠드는 소음이 훨씬 더 큰데 왜 비싼 스피커가 놓여있는 것일까 의문이 들었지만 사장님께 여쭤볼 용기는 없었다). 필자는 수업 시간에 종종 스피커로 음악을 듣는 학생의 수요에 대해 묻는데, 운이 좋으면 2년에 한 번 정도 마주하곤 한다.

1881년 파리 엑스포에서의 오페라 공연을유선망을 통해서 외부에서 들을 수 있게 해주었던떼아뜨로폰(Théâtrophone)의 홍보 포스터.최초의 구독형 서비스라고 할 수 있는 이 서비스를 통해공간의 제약을 넘어 음악을 경험하는최초의 가상 세계로의 여행이 시작됐다고 볼 수 있다.[쥘 셰레 작품-Artists Rights Society 자료]

먹이사슬의 최상층에 위치하던 거대 파충류를 밀어내고 지배자로 군림한 포유류와 같이 현 시대 음악 감상의 지배종은 헤드폰이다. 물론 헤드폰도 크기만 작아졌을 뿐 스피커의 한 종류다. 그러나 헤드폰은 스피커로 소리를 듣는 것과는 전혀 다른 성격으로 사회에 자리잡았다. ‘저는 이걸 써야 (일해야) 능률이 오릅니다만...’이라며 직장에서도 헤드폰을 쓰고 일 하는 MZ 세대의 모습을 시사 풍자 프로그램에서 얼핏 본 적이 있다. 직장 상사의 잔소리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표현일 수도 있으나 긍정적으로 보면 바깥 세상의 여러 잡음에서 자신을 분리시켜 일에 집중하겠다는 표현일 수도 있다. 필자도 그런 부류다. 논문을 쓰거나 읽을 때, 혹은 생각 실험을 진행할 때 헤드폰으로 나를 외부의 소리로부터 분리시킨다. ‘소리’의 측면에서 바라보자면 헤드폰을 착용하는 것이야 말로 나만의 가상 공간으로 들어가는 가장 간단한 방법인 것이다.

일찍이 미국의 심리학자인 로버트 소머(Robert Sommer)는 ‘개인적 공간(Personal Space)’이라는 그의 저서에서 헤드폰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심리를 개인적인 공간을 확보하고 그 안에서 안정을 찾으려고 하고 동시에 ‘방해하지 말아주세요’라는 신호를 타인에게 보는 행위에서 기인한다고 분석한 바 있다. 1980년대 소니 워크맨의 보급은 이러한 헤드폰으로 만드는 개인적인 공간에 이동성을 추가해 가져다 줬고, 언제 어디서든 내가 원하는 소리 공간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됐다.

필자가 이전부터 즐겨보던 일본 애니메이션 ‘에반게리온’ 중 주인공 신지 이카리는 휴대용 디지털 테이프 머신을 이용해 ‘모든 인간은 형제가 된다’고 노래하는 베토벤 9번 4악장의 환희의 송가를 듣곤 한다. 강경한 아버지로부터 억지로 주어진 세계 구원의 의무 등 지친 전투와 버거운 일상을 뒤로 하고 음악의 공간 속으로 들어가며 평온을 찾는다. 자신의 희생까지 불사하며 악의 무리를 물리치는 기존 영웅 서사와는 달리 1990년대 초반의 무기력한 일본 젊은이들의 자화상을 잘 대변하는 캐릭터였다. 지친 현실을 도피하는 탈출구가 바로 헤드폰인 셈이다. 그랬었다.

그런데 최근의 헤드폰은 사회적 분리와 개인 공간의 확보라는 이전의 개념을 넘어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 헤드폰은 자신의 개성을 외부로 표현하는 패션의 일부가 됐고 사람들은 자신의 머리 크기의 반 정도 되는 헤드폰을 착용한 채 다양한 액세서리를 붙이고서 자연스럽게 거리를 활보한다. 자신의 귀 위에 또다른 귀를 장착하며 인류는 새로운 양상으로 진화해가고 있다. 신지 이카리처럼 도피의 수단이 아닌 자신의 개성을 드러내는 도구로서 헤드폰의 쓰임이 바뀌고 있다.

ChatGPT가 생성한 헤드폰으로 경험하는 새로운 소리 세계로 여행하는 사용자를 상상한 그림

특히 헤드폰의 외부에 마이크를 설치해 사용하는 고도화 된 이 기술은 인간을 새로운 종으로 바꾸고 있다. 개과에 속하는 몇 종의 동물을 제외하고는 자율적으로 귀를 여닫는 것은 불가능하다. 인간도 예외는 아니다. 원하는 대로 귀를 움직여 바깥의 소리를 듣지 않는 방법은 선천적으로 주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현재의 헤드폰 기술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귀를 여닫을 수 있도록 돕는다. 24시간 쉴 새 없이 주위를 경계하며 일하던 우리의 청각기관이 마침내 안식을 맞이할 수 있는 시대가 온 셈이다.

이제 개인적 공간의 분리가 아닌, 공간을 연결하고 동시에 그 공간을 증강하는 기술까지 헤드폰이 가져다 주기 시작했다. 주위를 인식해서 나의 생존에 위협이 되거나 혹은 중요한 정보가 있을 때는 마이크를 통해 외부의 소리를 들을 수 있게 하고, 반대로 소음제거 기술을 이용해 외부의 잡음을 제거한다. 원하는 콘서트 홀의 음향을 재현하기도 하고 동시에 맑은 날씨에도 나에게만 비 오는 소리를 배경으로 다른 사람과 대화하는 것과 같은 환경을 만들 수도 있다. 호모 사피언스가 자연에서 살아남기 위해 진화해온 우리의 청각기관이 이제 다른 방향으로도 진화를 시작한 것이다. 웰컴 투 헤드폰 인류.

그렇기에 이 헤드폰 기술에 관심을 가지고 투자하는 회사들은 점점 많아지고 있다. 필자가 몸 담았던 야마하라는 회사는 악기 및 오디오 장비 분야에서는 단연 세계 1위를 차지했으나 헤드폰 시장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세계에서 가장 비싼 헤드폰 중 하나를 야마하가 생산 및 판매하고 있다. 그만큼 호모 헤드포니쿠스들은 새롭고 다양한 헤드폰을 찾고 있고 이러한 동력이 새로운 헤드폰 기술을 진일보하는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러한 영향의 종점에 오디오, 음악 그리고 사람들은 어떤 모습을 띠고 있을까. 막연히 상상해보며 오늘도 나는 내 귀 위에 새로운 귀를 덮고 나만의 음악 세계로 여행을 떠난다.

hongi@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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