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폰과 EUV 놓쳤던 인텔…‘파운드리 부활’ 꿈도 물거품 되나[딥다이브]
칩질라(Chipzilla)라는 말을 아시나요. 칩(반도체)+고질라의 결합어이죠. 고질라처럼 거대한 반도체 회사, 어디를 부르는 말일까요. 삼성전자? TSMC? 엔비디아? 바로 주인공은 ‘인텔(Intel)’입니다.
인텔. 미국을 대표하는 반도체 회사이지만 이제 시가총액으론 엔비디아의 30분의 1, TSMC 8분의 1, 삼성전자의 4분의 1짜리 기업입니다. 한동안 부활의 시동을 거는 듯했었지만, 최근 들려오는 소식은 온통 악재뿐이죠. 56년 역사상 가장 암울한 시절을 겪고 있는데요. 오늘은 반도체 거인 인텔의 추락을 들여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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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사 이래 가장 큰 위기
2분기 실적은 재앙에 가까웠습니다(16억 달러 손실). 이후 대규모 정리해고를 발표했고요(직원의 최대 15% 해고). 핵심 임원들이 줄줄이 회사를 떠났고(반도체 전문가 립부탄의 이사 사임), 고객사와의 협력은 불발됐습니다(소프트뱅크와의 AI칩 생산 논의 결렬). 주가는 불과 두 달 만에 반토막 나면서, 10여 년 만에 가장 낮은 수준. 이달 중순엔 추가 구조조정 계획이 또 발표될 계획이라고 하죠. 자율주행 자회사 모빌아이와 일부 사업부도 내다 팔 거란 관측이 나옵니다. 심지어 가능성은 크지 않아 보이지만 파운드리 사업부 분할 가능성까지 제기되죠. 정말 어떻게 이렇게 최악일까 싶을 정도로 지금 인텔엔 악재가 가득합니다.
인텔은 반도체 설계부터 제조까지 다 하는 ‘통합장치제조업체(IDM)’입니다. 인텔의 파운드리 사업의 가장 큰 고객은 인텔이죠. 그런데 앞으론 엔비디아도, 애플도 반도체 생산을 인텔 파운드리에 맡기게 만들겠다는 게 겔싱어 CEO가 내세운 청사진이었습니다. 당시 미국 언론은 ‘인텔이 돌아왔다(Intel is back)’며 환호했고요.
미국 정부 역시 2022년 반도체 육성법을 통해 밀어줬습니다. 미국에 공장을 짓는 반도체 기업 중 가장 많은 지원금(85억 달러 보조금 +110억 달러 대출)을 받는 건 (당연히) 인텔이니까요.
아니, 이렇게까지 열심히 하고 있는데, 그리고 내년이면 성과가 나오기 시작한다는데. 왜 시장은 기다려주지 못하고 벌써 인텔이 끝난 것처럼 난리일까요. 막대한 투자비를 잡아먹는 인텔의 변혁 프로젝트가 사실상 도박에 가깝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뒤처져 있는 제조역량을 끌어올린다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고, 어쩌면 영영 불가능할지 모른다고 보는 거죠. 구세주인 줄 알았던 겔싱어 CEO에 대한 신뢰를 거둬들이는 건데요.
과거 인텔은 한발 앞서가는 기술력으로 명망 높았던 회사입니다. 그런데 어쩌다 기술 혁신에 취약하고 시장 적응력이 떨어지는 조직으로 평가절하되고 있을까요. 그 이유를 찾으려면 먼저 20년 전으로 거슬러 가야 합니다.
아이폰을 놓쳤다
지금 보면 ‘어떻게 그런 말도 안 되는 짓을’이라고 여기겠지만, 2005년은 아직 아이폰이라는 게 세상에 없었을 때입니다(2007년 1월 첫 공개). 당시 인텔의 폴 오텔리니 CEO(2005~2013년 재임)는 아이폰이 ‘틈새 상품’일 뿐이라고 판단했습니다. 돈 되는 PC용 CPU(중앙처리장치) 사업이 있는데 굳이 모바일 칩에 역량을 쏟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거죠.
훗날 오텔리니 CEO는 이렇게 자신의 실수를 인정합니다. “만약 우리가 (아이폰 칩 생산을) 해냈다면 세상은 많이 달라졌을 겁니다. 그들(애플)은 관심 보였던 칩에 특정 가격을 지불하고 싶어 했고, 그 가격은 우리가 예상한 비용보다 낮았습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예상 비용은 틀렸고 물량은 생각보다 100배나 많았습니다.”
2010년대 들어서자 PC 시장의 성장은 정점을 지나가고 모바일 시장은 폭발적으로 성장합니다. 애플이 2014년부터 아이폰용 반도체 물량을 몰아준 기업은 대만 TSMC. 이를 통해 TSMC가 글로벌 파운드리 업계의 절대 강자 지위를 굳히게 됩니다.
EUV도 놓쳤다
CPU 같은 프로세서(처리장치)는 트랜지스터가 많을수록 더 빨라지죠. 1971년 인텔의 첫 상용 마이크로프로세서 4004는 약 2000개의 트랜지스터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프로세서 하나에 수십억개 트랜지스터가 장착되죠. 트랜지스터를 얼마나 더 작게 만드느냐가 매우 중요한 이유입니다.
그리고 그것(더 작게 만들기)을 가장 잘하는 회사가 한때는 인텔이었습니다. 2년마다 새로운(=더 작은) 공정으로 칩을 출시하고, 출시 다음 해엔 설계와 기술을 개선하기를 반복했죠. ‘기술의 혁신(틱)-개선(톡)’을 쉬지 않고 반복해서 ‘틱톡 모델’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2014년 브라이언 크르자니치 CEO(2013~2018년)는 개발비가 많이 드는 이 틱톡 모델을 포기합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2016년에 10나노미터(㎚) 공정이 출시돼야 하지만, 이를 포기하고 기존 14㎚ 공정을 몇 년 더 유지하기로 한 거죠. ‘틱톡틱톡’ 대신 ‘틱톡톡톡…’이 된 겁니다.
사실 인텔은 1990년대부터 ASML에 막대한 투자를 해 EUV 기술 개발에 중추적인 역할을 한 기업입니다. 하지만 정작 우여곡절 끝에 EUV가 출시된 2014년엔 고객리스트에서 빠졌죠. ‘굳이 값비싼 EUV가 꼭 필요한가. 우리 기술로도 10㎚ 공정은 충분히 할 수 있겠는데’라는 안일한 판단이었습니다. “문제 중 일부는 우리가 성공에 대해 폐쇄적이고 오만해졌기 때문이었습니다”(인텔의 베테랑 엔지니어 마크 필립스).
하지만 경쟁사는 달랐죠. TSMC와 삼성전자는 아직 검증되지 않은 새로운 장비인 EUV를 적극적으로 도입했고요. 두 회사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7㎚(2018년)→5㎚(2020년)→3㎚(2022년) 칩 양산에 착착 성공합니다. 인텔이 EUV를 처음 적용해 7㎚급을 양산하기 시작한 건 한참 뒤늦은 2023년. 한때 ‘실리콘 밸리’의 대명사였던 인텔은 그렇게 혁신을 잃었고, 제조 공정에서 뒤쫓아가기 바쁜 신세로 전락했습니다.
성공 확률은 1%?
무모한 도전이었지만, 마땅한 다른 선택지가 보이지 않기도 했습니다. 인텔의 살길은 파운드리 사업에 있다고 봤으니까요. ‘미국의 칩 제조 챔피언’으로 다시 우뚝 서서, 엔비디아·애플·퀄컴 같은 기업의 반도체 제조를 아웃소싱하는 공장이 된다면 잃었던 영광을 되찾을 수 있단 구상이었습니다.
그리고 3년 반이 지났습니다. 인텔은 계획대로 기술 혁신의 속도를 끌어올리는 데 성공했을까요? 글쎄요. 그게 좀 이상합니다.
공식 발표자료만 봐서는 인텔의 속도전은 그럭저럭 순항 중입니다. 올해 6월 3㎚급인 ‘인텔3’ 공정 양산을 시작했고요. 올해로 계획했던 2㎚급(20A)은 건너뛰고, 내년에 바로 1.8㎚ 반도체(이름은 ‘18A‘) 양산에 돌입할 거라고 밝혔습니다.
반도체 제조 기술은 원래 중간단계를 뛰어넘기가 대단히 어렵습니다. 실제 생산라인에서 새 기술을 대규모로 구현해 보면서 수율을 높여 나가야 하기 때문이죠. 기술적으로 3㎚ 칩을 만드는 것과 3㎚ 칩을 수익성 있게 대량생산하는 건 다른 문제인 겁니다. 그래서 궁금합니다. 만약 인텔이 3㎚ 칩 대량생산 능력을 갖췄다면, 도대체 왜 인텔은 왜 차세대 PC 프로세서(루나 레이크) 생산을 TSMC에 맡긴 거죠?
인텔의 야심작 18A(1.8㎚ 칩) 개발도 의문투성이입니다. 18A는 인텔 파운드리의 미래가 달린 비장의 무기이자 마지막 희망 같은 기술이죠. 그런데 최근 로이터는 인텔 18A가 브로드컴(Broadcom) 초기테스트에서 “실패했다”고 전합니다. 18A 공정이 ‘아직 대량생산으로 전환하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다는 거죠. 앞서 지난달 FT는 일본 소프트뱅크가 AI 칩 생산을 위해 인텔과 벌인 협상도 비슷한 이유로 결렬됐다고 전했습니다. ‘인텔이 양과 속도에 대한 요구사항을 충족할 능력이 없다’고 소프트뱅크는 주장합니다. 겔싱어 CEO는 그동안 18A 수율이 엄청 높다고 큰소리쳐 왔는데요. 이게 어찌 된 일일까요. 내년에 생산에 들어간다면서 현재까지 발표된 고객사는 마이크로소프트(MS) 한 곳뿐인데, 그래도 괜찮을까요.
그리고 걱정스러운 건 대량생산 기술만이 아닙니다. 어쩌면 파운드리 사업 성공에선 기술만큼이나 중요한 게 있습니다. 바로 고객별 제각각인 요구사항을 제품에 반영해 맞춤화하는 ‘고객 서비스 능력’이죠. 그리고 이건 인텔이 이전엔 해본 적 없는(할 필요 없었던) 가장 취약한 부분입니다.
겔싱어 CEO는 그동안 2027년엔 인텔의 파운드리 사업이 수익을 올릴 수 있다고 투자자들에게 얘기해 왔습니다. 달리 얘기하면 그때까진 막대한 투자비와 그로 인한 적자, 구조조정과 주가 하락 같은 폭풍에 계속 시달릴 거란 뜻이죠. 시장은 이미 인내심을 잃고 있습니다. ‘밑 빠진 독’이 될 거란 전망에 투자자들이 냉정하게 돌아서고 있죠.
“나쁜 회사는 위기에 파괴되고, 좋은 회사는 위기를 견뎌내고, 위대한 회사는 위기를 통해 발전한다.” 1980년대 인텔을 구한 전설적인 CEO 앤디 그로브가 남긴 유명한 말입니다. 약 40년 전 메모리 반도체를 버리고 마이크로프로세서에만 집중하기로 했던 그의 과감한 결정은 인텔을 침몰 직전에 구한 전환점이 됐었는데요. 인텔은 그때처럼 회사의 명운이 걸린 도박 같은 이 도전을 성공으로 이끌 수 있을까요. 아니면 이미 너무 늦은 걸까요. By.딥다이브
인텔의 스토리는 역시 창사 이래 최대 위기를 맞은 미국 항공기 제조사 보잉과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보잉이 비행기가 추락하고 문짝이 떨어져 나가는 등 요란하게 몰락을 알린 것과 달리, 인텔은 조용히, 하지만 빠르게 침식되고 있었죠. 주요 내용을 요약해 드리자면.
-인텔이 위기를 맞았습니다. 부활을 위해 파운드리 사업에 뛰어들어 막대한 투자에 나선 지 3년. 하지만 실적이 곤두박질치고 적자에 빠지면서, 이 도박 같은 투자가 과연 성공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이 커집니다.
-인텔의 추락은 그동안 쌓인 경영상 실책의 결과물입니다. 스티브 잡스의 아이폰용 칩 제조 제안을 거절해 모바일 시장을 놓쳤고, ASML의 EUV 장비를 도입하지 않으면서 기술에서 뒤처지기 시작했죠.
-팻 겔싱어 CEO는 이제라도 따라잡을 수 있다고 장담하지만, 투자비는 너무 많이 들고 기술 진전은 속도가 붙지 않습니다. 고객사가 없는 파운드리 사업이 무슨 소용일까요. ‘성공확률은 1%’라는 냉정한 평가가 이어집니다.
*이 기사는 10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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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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