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예훼손죄 존폐를 묻는다 [홍성수 칼럼]

한겨레 2024. 9. 11.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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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이 ‘윤석열 대통령 명예훼손’ 수사 목적으로 정치인과 언론인, 심지어 일반 시민까지 무차별적으로 통신 조회를 한 사실이 드러났다. 서울중앙지검 청사 모습. 연합뉴스

홍성수 | 숙명여대 법학부 교수

검찰이 윤석열 대통령 사건을 수사하며, 통신사로부터 고객 3176명의 개인정보를 제출받았다고 한다. 수사기관의 통신정보 수집을 통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또 한가지 주목해야 할 것은 이 수사를 가능하게 한 죄명이 다름 아닌 ‘명예훼손’이라는 것이다. 검사 10여명으로 구성된 특별수사팀이 수사하고 있다는 얘기도 들린다. 과연 명예훼손이 이렇게 방대한 국가 수사력을 투입하고 멀쩡한 시민 수천명의 개인정보를 수집해야만 하는 문제란 말인가?

10여년 전만 해도 명예훼손은 진보와 보수의 입장이 뚜렷하게 대립하는 이슈였다. 이명박 정부 시절, 광우병 문제를 보도한 문화방송(MBC) 피디(PD)수첩이 공직자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이유로 압수수색을 당했고 제작인은 기소되었다. 이명박 정부를 비판했다가 입건되었던 ‘쥐코’ 동영상 사건, 박지원 의원이 박근혜 당시 대통령 관련 로비 의혹을 폭로했다가 기소되었던 사건도 있었다. 산케이신문 전 서울지국장이 박근혜 전 대통령의 사생활 의혹을 제기했다가 재판을 받았던 사건도 잊을 수 없다. 이 모든 사건의 죄목은 바로 ‘명예훼손’이었다.

그때만 해도 보수는 명예훼손을 무기로 정권을 비판하는 세력들의 입을 틀어막으려고 했고, 진보는 ‘표현의 자유’를 옹호하며 이에 저항했다. 2012년 인권·시민단체들은 ‘표현의 자유를 위한 연대’를 결성하고 544쪽에 달하는 ‘표현의 자유를 위한 정책 제안’ 보고서를 발표했다. 당대의 시민사회 역량이 총집결된 이 보고서는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대표적인 악법으로 형법상 명예훼손죄를 지적했고, 명예훼손죄의 전면 폐지를 제안했다. 표현의 자유와 명예훼손죄 문제가 공론화되었고, 그 이후 민주당 의원들의 주도로 명예훼손죄의 남용을 막는 여러 입법안이 발의되는 성과로 이어졌다.

하지만 더 이상 명예훼손죄는 보수가 독점하는 무기가 아니다. 오늘날의 명예훼손죄는 문재인 전 대통령을 ‘간첩’ 또는 ‘공산주의자’라고 부른 사람들을 법정에 세운다. 유시민 전 노무현재단 이사장은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 명예를 훼손했다는 이유로 기소되어 유죄를 받았지만, 정진석 대통령실 비서실장도 노무현 전 대통령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는다. 한동훈 대표는 딸의 허위 스펙 의혹을 보도한 기자들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했고, 박홍근 민주당 의원은 한동훈 대표가 당에 대한 허위사실을 유포하여 명예를 훼손했다는 이유로 고소를 했다. 이것은 철저히 한국적 현상이다. 상당수 국가에서 명예훼손은 범죄가 아니며, 명예훼손죄가 있는 나라에서도 명예훼손죄가 이렇게 남용되는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피디수첩 사건 이래로 법원이 공적 사안과 관련된 명예훼손 사건에서 유죄 판결을 내리는 것에 매우 신중하다는 점이다. 실제로 위 사건들의 상당수는 무혐의와 기소유예로 처리되거나 무죄 판결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소·고발 공방전이 근절되지 않는 이유가 있다. 수사가 시작되면 당사자는 조사를 받고 심지어 압수수색을 당하기도 한다. 그것만으로도 상대방은 충분히 위축되고 고초를 겪는다. 나중에 무혐의나 무죄로 나오더라도 고소·고발의 본래 목적은 이미 달성된 이후다. 고소·고발은 수사·재판 결과와 무관하게 ‘남는 장사’로 계산된다. 명예훼손은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손쉽게 동원될 수 있는 수단이다.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빠른 방법은 정치권이 스스로 명예훼손 고소·고발을 자제하고, 수사기관은 절제된 수사를 신속하게 마무리하는 것이지만, 그런 일은 벌어질 것 같지 않다. 결국 입법적 조치를 취하는 수밖에 없다. 가장 급진적으로는 명예훼손죄를 폐지하면서 다른 대체 규제 수단을 마련하는 것이고, 친고죄 전환, 명예훼손죄 성립 요건 강화, 위법성 조각 사유 강화 등으로 명예훼손죄의 적용 범위를 적절한 수준에서 제한하는 것도 효과적인 방법이다.

너나 할 것 없이 명예훼손을 도구화하는 상황에서 그 존폐에 대한 논의의 장이 열릴 수 있을지는 난망한 일이지만, 명예훼손의 존폐가 더 이상 특정 정치세력이 유리하고 불리한 문제가 아니라는 점에 주목해 보자. 명예훼손죄 남용을 막자는 것은 상대를 부당하게 괴롭힐 수 있는 무기를 ‘함께’ 내려놓자는 제안이자, 수사기관과 법원에 떠넘기지 말고 우리가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보자는 뜻이다. 현재의 우리 정치문화가 미성숙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것은 핑계일 뿐이다. 정치가 해결해야 할 일을 사법에 위탁하는 것이 고착화되면 정치적 역량이 더욱 축소되는 악순환에서 벗어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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