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로테스크: 우리 정치를 수식하긴 아까운 말 [김용석의 언어탐방]

한겨레 2024. 9. 11.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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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유아영

김용석 | 철학자

오늘날 한국 정치는 비상식적인 일로 가득한 것 같다. ‘상식’을 내세운 정부는 기억상실에 걸린 듯 전혀 상식적이지 않은 행보를 보이고, 여야 정치인들은 서로를 향해 ‘어느 나라’ 정당이냐고 힐난한다. 서로 상대를 ‘이상한 나라’에서 온 사람 취급한다. 급기야 우리 정치를 묘사하는 데에 ‘그로테스크’라는 말까지 등장했다. 일반적인 수식어로서 이 말에는 이상하고 괴기하며 흉측하고 불편하며 조화롭지 않다는 느낌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미학 용어로서 그로테스크(grotesque)는 예술사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이 말이 사회·정치 현상을 비난하기 위해 사용될 때는 그 개념어적 가치가 훼손되기 십상이다. 이에 언어의 기원을 알아보고 그 말이 정치 영역에 차용되는 현상을 살펴봄이 좋을 것 같다.

1480년 로마 콜로세움 근처 지하에서 네로 황제의 ‘도무스 아우레아’(Domus Aurea), 곧 황금 저택의 일부가 발견되었다. 1400년이 넘는 세월 속에 침하 현상을 겪으면서 지하에 묻혀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서기 64년 로마의 대화재 이후 네로의 명으로 짓기 시작했던 미완성 건축물이었다. 그곳에서 발견된 벽화는 당시까지의 정통 회화 기법과는 다른 양식으로 그려져 있었다. 동물, 식물, 사람의 모습이 다양한 형태로 얽혀 균형이 비틀리고 기괴하며 환상적인 그림들이었다.

이는 발견 당시 화가들에게 매우 생경한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다. 예술가는 새로운 창작 기법에 환호한다. 라파엘로를 비롯한 많은 화가들이 이 기법을 즉각 실현에 옮겼고 15세기 말에서 16세기에 그로테스크 기법은 빠르게 확산되었다.

지하의 도무스 아우레아로 내려가는 길은 마치 동굴 속으로 들어가는 것 같았다. 당대의 예술가들은 이 ‘동굴’ 속으로의 미적 탐험을 즐겼던 것 같다. 이탈리아어로 동굴은 ‘그로타’(grotta)이다. 여기서 그런 예술 양식을 가리키는 ‘그로테스카’라는 용어가 탄생했으며, 다른 유럽 언어에 전파되었다. 신비로운 발견, 폭군 네로, 동굴 등이 주는 특별한 어감은 또한 그로테스크가 그 단어 자체로도 기괴함의 뉘앙스를 풍기게 하는 데 일조했다.

고대 그리스에서부터 르네상스 시대까지 미적 표현의 대원칙은 비례, 균형, 대칭, 조화였다. ‘문예부흥’이라는 말처럼 르네상스는 고대 문예를 전수하고 발전시켜 ‘조화의 미학’을 최고도로 완성시켰다. 절정에 이르면 그것을 극복하고 그것에서 일탈하게 된다. 이는 예술사에서 2000여년 동안 작가들에게는 대원칙이자 작품의 수용자에게는 감상의 확고한 상식이었던 것을 넘어서, 다양한 예술 사조로 가는 길을 연다는 것을 의미한다.

르네상스는 예술사적으로 부흥일 뿐만 아니라, 극복과 일탈의 계기라는 데에 큰 의미가 있다. 이에 그로테스크 양식이 공헌했다는 데에는 미학사에서 이론의 여지가 많지 않다. 바로크와 로코코를 거쳐 19세기 초 낭만주의에 이르러, 빅토르 위고의 말처럼 그로테스크는 문학과 미술의 세계에서 “막대한 역할을 했다. 그것은 도처에 존재했다”고 할 수 있다.

그로테스크는 넓게 보면, 예술 행위의 특성이다. 예술은 현실을 전복하고 허구를 만들며 사람들을 환상과 놀이의 세계로 초대하기 때문이다. 곧 상식을 초월하는 기능을 한다. 이는 또한 예술과 밀접한 과학과 철학의 특성이기도 하다. 이들도 상식적이지 않은 활동을 하기 때문이다. 과학은 새로운 발견과 발명을 하며, 철학은 각질화한 상식의 허위를 밝혀냄으로써 ‘참’으로 가는 다양한 길을 모색한다.

정치는 상식의 영역이다. 국민이 나라의 주인이고 그들의 의사가 정책 결정의 근간이 되는 현대 민주주의에서는 더욱더 그렇다. 정치 행위가 공동체 구성원 사이에서 이해관계의 균형과 조화를 찾아야 하는 것은 상식이다. 이것이 곧 정의의 실현에 직결된다는 것도 상식이다. 위정자의 언행이 그로테스크하다고 할 때는, 물론 언어의 미학사적 의미는 탈색하고 직설적 어감만 남는다. 그냥 비상식적이고 해괴한 것을 가리킬 뿐이다. 오늘 우리 정치 무대에서 비판의 수식어로 그로테스크라는 표현을 쓰기에는, 그 말이 너무 아깝다는 생각도 든다. 위정자가 그로테스크해서 국민을 앞이 캄캄한 그로타, 곧 동굴 속으로 데려가는 일은 없어야 하리라.

외국에서도 정치 현상에 그로테스크란 말을 쓰는 경우가 있다. 1982년 아일랜드에서 살인범이 당시 법무장관의 사저에서 체포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에는 범인과 장관의 특수 관계를 비롯한 일련의 뒷이야기가 얽혀 있어서 충격적이고 사회적 파장이 컸다. 당시 총리는 해당 장관과 거리를 두면서 “해괴한 사건, 전례 없는 사태, 그로테스크한 상황, 거의 믿을 수 없는 액운”이라는 발언을 했다.

이에 아일랜드의 저명한 언론인이자 정치가인 코너 크루즈 오브라이언은 총리가 사용한 4개 형용사의 머리글자를 재배치해서 “구부”(GUBU)라는 표현을 만들었고, 이는 빠르게 퍼져 지금도 정치 스캔들과 비상식적 정치 행태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된다. 구부는 “그로테스크(G), 믿을 수 없는(Unbelievable), 해괴한(Bizarre), 전례가 없는(Unprecedented)”의 머리글자로 만든 약어다. 여기서 우리말 신조어로 ‘구부하다’라는 형용사를 만들어볼 수도 있다. 현재 우리나라 위정자들의 행태는 단순히 그로테스크하다기보다 좀 더 상세하게 묘사해서 ‘구부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그런데 잘 보면 이 4개의 형용사는 여전히 예술 창작 행위의 특성과 연관된 뉘앙스를 풍긴다. 창의적 성과는 그로테스크하고 기괴할 뿐만 아니라, 믿기지 않고 전례가 없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 수식어 목록에는 정치비평에서 빼놓을 수 없는 형용사가 빠져 있다.

정치는 정책으로 구체화하며, 위정자는 그에 책임을 진다. 그래야만 국민이 ‘신뢰할 수 있는’ 정치가 가능하다. 책임과 신뢰는 짝을 이루는 개념이다. 이런 점에서 현재 우리 정치 상황에는 ‘신뢰할 수 없는’(Unreliable)이라는 수식어를 하나 더 붙여야 할 것 같다. 현재 우리 정치와 정부와 정책은 모두 ‘구부우’(GUBUU)하다. 더 많은 머리글자 ‘우’(U)가 붙지 않기를 바라야 할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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