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건축] 아름다운 관계를 담은 건축

2024. 9. 11.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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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칼럼에서 생명력을 담은 건축으로 종묘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땅과 곡식의 신을 의미하는 사직에 대해 잠깐 언급했다.

서울 경복궁 서편에 위치해 땅과 곡식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서울 사직단은 대지 중심 동편에 땅의 신을 위한 사단과 서편에 곡식의 신을 위한 직단이 따로 설치돼 있다.

명확하게 우리나라의 사직단 규모가 확인된 고려 사직단은 동편의 사단과 서편의 직단이 2개의 단으로 구성돼 있으며, 단의 규모는 너비가 5장, 즉 50자이고, 높이는 3자 6치라고 고려사에 기술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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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태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전통건축학과 교수

지난 칼럼에서 생명력을 담은 건축으로 종묘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땅과 곡식의 신을 의미하는 사직에 대해 잠깐 언급했다. 서울 경복궁 서편에 위치해 땅과 곡식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서울 사직단은 대지 중심 동편에 땅의 신을 위한 사단과 서편에 곡식의 신을 위한 직단이 따로 설치돼 있다.

사직단은 고대 중국 주나라에서부터 조성했으며, 원나라에 이어 명태조인 주원장이 중국을 통일하고 황실과 국가의 의례 및 규범을 규정한 예법을 간행하면서 명확한 규모와 형태를 법으로 규정해 완성됐다.

삼국시대 이래 사직의 주인인 국왕은 국가와 백성의 안녕을 위해 제사를 지냈는데, 특히 고려 성종은 유교적 정치이념을 통해 중앙집권적 지배체제 형성을 위해 원구단, 태묘, 사직 등 국가적 예제건축물을 조영했다. 이는 고려가 황제국가임을 널리 알리어 국가적 위상을 고취시키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여기서 우리는 사직단의 규모와 형태를 자세히 살펴보아야 한다.

명확하게 우리나라의 사직단 규모가 확인된 고려 사직단은 동편의 사단과 서편의 직단이 2개의 단으로 구성돼 있으며, 단의 규모는 너비가 5장, 즉 50자이고, 높이는 3자 6치라고 고려사에 기술돼 있다. 이는 고려가 황제국으로 중국의 천자의 예와 같은 형태와 규모로 사직단을 조성한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사직단의 변화가 발생한다. 동편의 사단과 서편 직단의 형태가 고려의 것과는 동일하지만, 단 너비가 기존 50자에서 절반으로 줄어 25자가 됐으며, 높이는 기존 3자 6치에서 6치가 줄어 3자가 됐다. 이것은 중국 제후국의 사직단 규모와 같은 것으로,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조선이 명에게 사대했기 때문에 사직단의 규모가 축소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 등의 사료를 바탕으로 진행된 연구결과를 살펴보면, 국격을 유지하기 위한 치열한 외교의 힘이 사직단 건립에 작용한 매우 재미있는 과정과 결과를 알 수 있다.

명태조 주원장은 1370년 제후국의 사직단을 사단과 직단으로 분리하고, 단의 규모는 천자가 있는 황도 사직의 반인 25자로 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은 대명집례를 편찬했는데, 이는 현재의 서울 사직단과 같은 규모와 형태이다.

그러나 11년 후인 1381년 편찬한 홍무예제에서는 사직단을 사단과 직단을 합해 1단으로 조성하게 했다. 이로 인해 명나라는 제후국인 조선에 사직단의 규모와 형태의 변화를 요구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이러한 정황은 사료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변화과정 속에서 조선의 사직단 규모는 제후국의 것과 같지만, 형태는 마치 황제국과 동일하기 때문에 조선 초 세종시기 사직단의 조성과 관리를 관장하는 부서인 예조의 관원과 집현전 학자들은 매우 큰 고심에 빠지게 됐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에 여러 학자들의 고민에 따른 대응논리로, 대명집례를 따라 사직단을 조성했는데 이후 홍무예제를 따라 재조성하라고 하는 것은 처음부터 통일이전의 명나라에 사대의 예를 갖춘 조선의 의리에 대한 문제제기와 함께, 이미 태종대에 전국 주부군현에 홍무예제를 기준으로 해 사직단을 조성한 사실로 대응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서울 사직단이 제후국의 규모와 황제국의 형태를 가진 독특한 모습으로 남아 있다는 사실은 세종대 예조와 집현전의 깊은 고민과 노력을 통한 명나라와의 외교관계의 결과로 볼 수 있다. 사직단을 통해 크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논리적으로 명확한 결과를 제시하며 도출한 상대방에 대한 관계설정과 대응은 단지 건축물이지만, 삶의 지혜와 방식을 일깨우는 옛 선조들의 단상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김상태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전통건축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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