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재원의 말의 힘]미친 헤라클레스

기자 2024. 9. 10. 2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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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속담에, ‘벗에게는 사랑을, 적에게는 증오를 주라’는 말이 있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이는 전시(戰時)에 힘을 발휘하는 전우론(戰友論)이었다. 자신의 애인이자 전우였던 파트로클로스를 죽인 헥토르에게 되돌려준 아킬레우스의 복수가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런데 이 전우론을 평시(平時)에도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특히 국내 정치를 대외 전쟁으로 인식하도록 만들고, 내 편을 지지하지 않거나 반대하는 진영과 정적을 동포이자 동료 시민이 아니라 죽이거나 제거해야 하는 적으로 보게 만드는 인식의 뿌리가 실은 전시의 전우론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쟁과 정치는 다르다. 정적도 동포이고 동료 시민이다.

에우리피데스의 <미친 헤라클레스(Heracles Mainomenos)>는 이 차이에 대한 인식이 왜 필요한지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전시의 전우관이 평시의 정치에 악용되어 정적을 적군으로 보게 만드는 인식을 전면적으로 비판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 편에게는 호의를, 네 편에게는 적의를!”이라는 인식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알려주기 위해 작품은 무대 한가운데에 자신의 완력과 권력에 심취한 헤라클레스가 자신의 정적인 뤼코스를 죽이면서 미쳐 날뛰는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네메아의 사자를 완력으로 때려잡는 헤라클레스의 모습으로 말이다. 그 덕에 그는 “인류의 위대한 은인이자 위대한 친구”(1252행)라는 칭호도 얻는다.

하지만 이런 모습은 가족과 동료 시민에게 보여야 하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이런 모습을 자신의 가족과 동료 시민에게 보이고 만다. 폭력과 광기로 돌변한 그의 완력과 용기의 결과는 참혹했다. 정적인 뤼코스를 죽이면서 미친 헤라클레스는 자신의 가족까지도 몰살해 버린다. 오열했지만, 너무 늦었다. 그의 아버지가 그토록 “서두르지 마라!”(586행)라고 했건만, 힘의 맛에 취한 그는 폭력의 잔치를 이미 거나하게 벌이고 만다. 용기가 광기로, 구원자가 파괴자로 돌변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말이다. 완력에 기반한 권력에 심취했던 헤라클레스는 이런 모습으로 정치의 무대에서 퇴출된다. 전쟁과 정치의 차이를 모르는 권력자의 뒷모습을 보이면서 말이다.

안재원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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