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 하나에 ‘사람의 길’과 ‘개의 길’이 갈린다

한겨레 2024. 9. 10. 1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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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이 잡념잡상 _07 유학자 김충호 (하)

그 반대가 무소불위(無所不爲), 결코 못 할 것이 없는 자다. 권력자가 시키면 무엇이든 다 하는 주구(走狗), 목줄을 풀어 명령을 내리면 정신없이 달려가는 개다.

끝내 하지 않는 바가 있는 그 길이 ‘사람의 길’이고, 먹이를 주는 자를 위해 못 할 짓이 없는 그 길은 ‘개의 길’이라는 뜻이다.
일러스트레이션 유아영

252년 후한 삼국시대, 위오 접경지역에서 양국이 격돌하는 동관의 동흥전투. 위나라 장수는 사마의의 아들 사마소, 오나라 장수는 제갈근의 아들 제갈각이다. 오가 지형을 이용하여 대승을 거둔다. 위는 병사 수만을 잃고 패퇴했다. 사마소가 패잔병을 이끌고 가다가 어느 협곡에 이르러 묻는다. “이번 패전은 누가 그 잘못을 책임져야 하겠는가?” 부하 장수 왕의가 답한다. “책임은 원수에게 있습니다(責在元帥).”

희생양을 찾으려 했는데 그 손가락질이 대장인 자신을 향하고 있는 것이다. 사마소가 격노한다. “너는 나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려 하는가”라면서 왕의를 끌어내 참수하고 회군한다. 왕의의 아들 왕부는 아비의 죽음을 원통해 하면서 은거했다. 조정에서 수차례 등용하려 해도 나아가지 않았다. 사마 일족이 위를 찬탈하고 진(晉)을 세우자, 왕부는 평생 궁이 있는 서쪽을 향해 앉지 않았으며, 그 나라 백성이기를 거부했다.

유학자 고당 김충호 선생은 ‘채상병 사건’ 관련, ‘소학’에 나오는 이 이야기를 들려준다. “책은 벼슬을 뿌리친 왕부의 효를 강조하고 있지만 사실 핵심은 ‘책재원수’라는 말입니다. 명령에 따라 격랑 속에 들어간 병졸이 죽어서, 그 책임도 져야 합니까? 책임은 우두머리가 지는 것입니다. 권한을 위임할 수는 있지만 책임을 위임할 수는 없는 법, 승리의 과실을 독차지하는 자가 패전의 책임도 져야 하는 법입니다. ‘이런 일로 사단장을 처벌하면 누가 사단장을 할 수 있겠느냐.’ 이것은 졸을 졸로 보는, 병졸(卒)의 죽음(卒)을 하찮게 여기는 생각이 깔려 있는 말입니다. 일국을 책임지고 있는 원수의 입에서 나올 수 없는 말입니다.”

권력자의 격노는 두렵다. 그 격노가 진짜 격노인지 가장된 격노인지 알 수 없되, 진짜 격노보다도 가장된 격노일 때, 격노의 대상자가 살아날 구멍은 더 작아 보인다. 진짜 격노는 오해가 풀리면 화해의 여지가 있지만 가짜 격노는 그 거짓을 감추기 위해 끝을 보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채상병 사건’의 격노가 진짜인지, ‘물이 스미듯 서서히 젖어드는 살갗을 파고드는 참소’처럼 장수라는 자의 눈물겨운 구명운동에 의한 가장된 격노인지, 특검 전에는 알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 진위를 떠나 격노 앞에 서 있는 사람은 위태롭다. 왕의는 참수되었고 대령 박정훈은 기소되었으니, 그 길은 목숨 걸고 가는 가시밭길이다.

고당은 왕씨 부자를 ‘견자’에 비유했다. 공자가 14년 열국주유를 마치고 노나라로 귀환할 즈음, ‘아아 돌아가야지, 돌아가야지, 고향에 가서 우리 젊은이들, ‘언행에 적실한 사람’(中行)을 얻어 함께하지 못한다면 ‘광견한 사람’을 얻으리라. 광자(狂者)는 진취하고, 견자(狷者)는 차마 하지 않는 바가 있기 때문이지’라고 하는 대목이 ‘논어’에 나오고, ‘맹자’에 자세히 나온다. 군자는 못 찾더라도 광자나 견자는 있지 않겠느냐는 말이다. 광자는 뜻은 크나 실천이 못 따르고, 견자는 ‘유소불위’, 끝내 하지 않음이 있는 자다.

고당은 견자의 예로 여말선초 문인 ‘조견’(趙狷)을 들었다. 중이 되었다가 환속하여 고려 말 안렴사 벼슬을 지냈다. 조선이 개국하자 이름 ‘윤’(胤)을 ‘견’(狷)으로 바꾸고 산중에 은거했다. 새 나라가 벼슬을 내려도 나아가지 않았다.

“태조가 형 조준을 대동하고 직접 집에 찾아옵니다. 방에 드러누워 내다보지도 않아요. 태조가 ‘나와 옛 친분이 있으니 빈주(賓主)의 예로 만나볼 수는 없겠는가?’ 하니, 의관을 정제하고 나와 읍만 하고 절은 하지 않아요. 왕이 아닌 객으로 대하는 것이지요, 태조가 감탄하면서 ‘조견은 그 뜻이 금석 같아서 빼앗을 수 없다’하고 청계 한 구역의 땅을 봉해줍니다. 조견은 끝내 출사하지 않고 양주 수락산 기슭에 들어가 생을 마칩니다.”(이 대목, 조선 전후기 기록이 달라 논란이 있으나 ‘정조실록’에 따름)

견(狷)은 성급하다는 뜻이다. 그러나 불변의 고집이 있다. 강물이 굽이굽이 물결 따라 흐르다가도 어느 폭포에 이르러 수직으로 긋는 직선 같은 것이랄까, 목에 칼이 들어와도 아닌 것은 아닌 사람이다. 그래서 유소불위(有所不爲), 끝내 하지 않음이 있는 자다. 그 반대가 무소불위(無所不爲), 결코 못 할 것이 없는 자다. 권력자가 시키면 무엇이든 다 하는 주구(走狗), 목줄을 풀어 명령을 내리면 정신없이 달려가는 개다.

고당은 “‘자왈, 비부(鄙夫)들과 정사를 함께할 수 있겠더냐. 이런 자들은 지위를 얻기 위해 못 할 짓이 없고, 또 얻은 뒤에는 잃지 않으려고 못 할 짓이 없는 자들이다.’ 비부는 비루하고 비열하고 비천한 자들입니다. 그 기준은 시킨다고 다 하느냐, 딱 하나라도 안 하는 것이 있느냐에 달려있습니다. 그 안 하는 하나가 ‘불의’(不義)입니다”라고 했다. 이 이야기를 ‘채상병 사건’에 들이대면, 인물별로 어찌 그리 딱 들어맞는지, 신발이 발에 딱 맞을 때 신발 신은 것을 잊어버리듯이, 저것이 옛 이야기인지 지금 이야기인지, 시대를 망각하는 착각이 든다.

고당은 단국대 은퇴 후 전북 순창의 훈몽재(訓蒙齋)에 머물며 강학을 시작했다. 훈몽재는 인종의 스승인 하서 김인후가 후학을 가르치던 곳이다. 문화유산이 대개 그렇듯 이끼와 잡풀이 무성하던 이곳에 2011년 고당이 ‘산장’으로 들어앉으면서 글 읽는 소리가 퍼져나갔다. 방학이 되면 한림원과 서울대 상지대 등 경향의 학생들이 숙식하며 배우러 찾아왔다. 전국 유림들이 모여 옛 시회처럼 문장을 외기도 하고, 강회를 열기도 하면서 훈몽재는 연간 4천여 명이 찾는 이 시대의 학림(學林)이 되었다.

소문이 중국에 퍼져 2017년 장시성 남창대 학생 50여명이 찾아와 열흘간 ‘공자’를 공부했고, 그 후로 양국 교류는 연례행사가 되었다. 그해 고당은 남창대의 초청을 받아 여산의 백록동서원에서 강학했다. 당나라 때 이발이 흰 사슴을 키우며 은거하던 이곳에 남송 때 학교가 세워졌고, 북송 때 백록동서원으로 개칭되었다. 주희가 강학하면서 크게 흥성한 주자학의 산실이며, 조선 백운동서원의 이름이 여기서 따왔다.

고당은 이어 후난성 상남대의 초청으로 염계서원에서 강학했다. 염계는 북송의 학자 주돈이(1017~1073)로, 공맹 이후 1500년 잠들어 있던 유학을 일깨운 개산조(開山祖)다. 만물의 생성을 ‘태극도설’로 정리, 유교철학의 새 지평을 열었던 인물로, 그 바탕 위에서 100년 뒤 주희의 성리학이 개화한다.

2017년은 염계 탄생 1천년이 되는 해, 후난성은 그에 맞춰 염계서원을 복원했다. 그 규모가 궁궐 크기였다. 건물은 지었는데 그다음을 어찌하나? 1966년 공자묘가 파묘되었던 문화대혁명의 ‘반달리즘’ 이후로 4천년 전통은 멸실되었으니, 예식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중국에서 훈몽재로 의뢰가 온다. 고당은 위패, 홀기, 축문, 제기, 예복 등을 준비하여 국내 유림 21명을 이끌고 그해 늦가을 염계서원에서 봉안식을 대행한다. 그런 인연이 깊어 고당은 백운동서원에서 4차례, 염계서원에서 3차례 중국 학생들을 모아놓고 강학했다.

무엇을 가르치셨냐고 물었더니, ‘학의 순서’라 한다. “소학-대학-논어-맹자-중용-시-서-역 순으로 해야지, 소학 건너뛰고 논어를 읽는 것은 하늘을 사다리로 올라가려는 격이라 지탱할 것이 없다, 하고는 13경에서 글을 뽑아 가르쳤지요.” 율곡의 ‘격몽요결’에 이런 내용이 다 나와 있다고 한다. 우리 유학자가 중국 주자학의 시원에서 경학을 강독하는 이 대목, 역설적이다. 남창대는 30권 ‘염계총서’ 출간을 준비 중인데 고당이 그동안 쓴 편지, 잡저, 기문, 시문 등 6권 분량의 글을 총서의 한 장으로 넣는다고 한다.

고당은 최애 한 구절로 ‘맹자’의 ‘독선기신’(獨善其身)을 꼽았다. “홀로 선을 닦는다는 이 말은 수기(修己)입니다. 공부를 왜 하고, 수양을 왜 합니까? 사람으로서 자존을 지키기 위함입니다. 자존은 직(直)입니다. 박 대령의 ‘항명’은 거적 깔고 도끼를 땅에 꽂아놓고, 궁궐 앞에 엎드려 나는 그 꼴은 못 보겠다고 항거하는 옛 선비의 모습과 닮지 않았습니까?” 그것이 견이고, 직이라고 했다. 주석을 달자면, 끝내 하지 않는 바가 있는 그 길이 ‘사람의 길’이고, 먹이를 주는 자를 위해 못 할 짓이 없는 그 길은 ‘개의 길’이라는 뜻이다.

이광이 | ‘정말로 바다로 가는 길을 나는 알지 못하지만, 그러나 바다로 가는 노력을 나는 그쳐본 적이 없다’ 목포 김현문학관에 걸린 이 글귀를 좋아한다. 시는 소질이 없어 못 쓰고 그 언저리에서 ‘잡글’을 쓴다. 삶이 막막할 때 고전을 읽는다. 머리가 많이 비어 호가 ‘반승’(半僧)이다. 동화 ‘엄마, 왜 피아노 배워야 돼요?’와 책 ‘절절시시’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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