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레그램 창업자 체포를 지켜보며 [세상읽기]
김준일 | 시사평론가
2019년 텔레그램을 통한 아동·청소년 성착취물 제작 유통 범죄인 이른바 ‘엔(n)번방 사건’이 큰 사회적 파장을 불렀다. 2020년 정부와 국회는 엔번방 방지법이라고 불리는 전기통신사업법 및 정보통신망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인터넷 플랫폼 기업의 불법 콘텐츠 유통 방지 의무를 강화한 것이 뼈대다. 국내 연 매출 10억원 이상, 일평균 이용자 10만명 이상인 부가통신사업자에게 불법 촬영물을 관리·감독하고 필요시 삭제 등 조치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국내 통신사업자인 네이버와 카카오뿐 아니라 국외 기업인 구글, 메타, 엑스(X·옛 트위터), 텔레그램 등도 이 법의 적용을 받는다.
하지만 법 제정 당시에도 텔레그램 등 국외 인터넷 서비스에서 발생하는 성착취물 범죄에 대해서는 실효성이 없다는 지적이 나왔다. 유관기관의 삭제 요청을 무시하더라도 정부가 합법적으로 텔레그램을 제재할 수단이 없기 때문이다. 텔레그램은 수년에 한번씩 본사 서버를 옮기고 서버에 통신자료를 남기지 않는 등 이용자 정보를 철저하게 비밀로 지켜주는 게 최대 장점이다. 고발사주 의혹 사건이 텔레그램에서 이뤄진 것은 이런 보안성 때문이다.
최근 텔레그램을 이용한 미성년자들의 딥페이크 성착취물 유통 문제가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텔레그램은 성착취물 유통의 온상이라는 비난에도 불구하고 별로 잃은 것이 없어 보인다. 지난 8월 텔레그램 국내 월간 활성 이용자는 347만명으로 전달보다 31만명가량 증가해 역대 최대 증가 폭을 기록했다고 한다. 텔레그램은 한국 경찰의 수사에 응하지 않아도 사업을 하는 데 큰 문제가 없다고 판단할 것이다.
외국 사례를 살펴보자. 전세계 각국 정부와 사법당국은 불법 콘텐츠를 유통하는 글로벌 온라인 플랫폼과의 전쟁을 벌이고 있다. 브라질 대법원은 최근 엑스의 자극적 서비스를 중단하도록 했다. 엑스가 가짜뉴스를 유포하고 있는 일부 계정 정지, 법률대리인 지정 요구를 묵살하자 법원이 방송통신 규제 기관에 접속을 차단하라고 명령한 것이다. 브라질 대법원은 과거 텔레그램이 경찰에 범죄 정보 제공을 거부하자 사용금지 명령을 내린 적도 있다.
프랑스는 최근 텔레그램 창업자이자 대표이사인 파벨 두로프를 자국에 입국하자마자 전격 체포했다. 프랑스 당국이 올 초 텔레그램이 미성년자 성착취물 유통이나 마약 밀매에 이용되고 있다고 판단하여 텔레그램 쪽에 용의자 신원공개를 요청했지만 이에 응하지 않은 탓이다. 영국도 아동 성착취물 등에 대해 빅테크 기업이 적절한 조치를 하지 않으면 경영진을 처벌하는 온라인안전법을 지난해 제정했다. 미국에서는 27개 주 정부에서 딥페이크를 규제하는 법안을 마련했다.
세계 각국의 이런 조처들은 글로벌 플랫폼의 불법 콘텐츠가 심각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에 뒤따르는 표현의 자유 위축이다. 지난 3월 스페인 고등법원은 지식재산권 침해를 이유로 텔레그램에 일시 중단을 명령했다. 방송사들이 텔레그램을 통해 자사 콘텐츠가 무단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주장한 것에 대한 판결이었는데 당시 소비자단체들은 강력하게 반발했다. 과잉 규제라는 것이 이유다.
한국에서도 표현의 자유 위축이 우려되는 권력의 긴급조치들이 있었다. 이명박 정부 때는 온라인 게시판에 주가 폭락을 예고한 일명 ‘미네르바’를 체포해 표현의 자유 침해 논란이 불거졌다. 인터넷 서비스 사업자에 대한 정치적 압박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지난달 국민의힘은 네이버 사옥에 직접 방문해 뉴스 유통 과정의 불공정성을 공개적으로 문제 삼았다. 소위 포털 길들이기다. 국내 아이티(IT) 기업들이 역차별에 과잉 규제라고 볼멘소리를 내도 서슬 퍼런 권력 앞에선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과잉 규제와 표현의 자유 침해 논란을 피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정교한 접근이 필요하다. 글로벌 인터넷 서비스에 떠도는 명백한 범죄 콘텐츠를 삭제해달라고 요청하거나, 불법 콘텐츠 감시 의무를 소홀히 했기에 서비스를 일시적으로 제한하는 조치는 심각하게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 정치권이 할 일은 사업자들을 어디까지 규제할 수 있는지 가이드라인을 정하고 법으로 이를 뒷받침하는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디지털 성범죄에 대해 관심이 지대한 모양이다. 떨어진 국정 수행 지지율을 끌어올리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이 아니길 바란다. 무엇보다 실효성 있는 대책이 나오려면 정부는 국회와 협조를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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