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생명 도외시한 ‘응급실 블랙리스트’ 철저히 수사·처벌해야
응급의료가 ‘뺑뺑이 사망’ 사태로 번지며 한계 상황인데 응급실 근무 의사들의 실명을 공개하고 조롱한 ‘응급실 블랙리스트’가 등장해 국민들의 분노가 커지고 있다. 촌각을 다투는 생명을 지키는 보루인 응급실은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멈춰서는 안 되는 곳이다. 그런 응급실 의사들에게 ‘심리적 테러’를 가한 행위는 의사 윤리 파탄을 넘어 용납 못할 반인륜적 범죄다. 정부는 철저한 수사·처벌로 국민 생명 보호의 토대를 허무는 행태를 엄단해야 한다.
‘응급실 부역’이라는 제목의 블랙리스트는 집단행동에 동참하지 않는 의사들 정보를 공개해온 ‘감사한 의사 명단’ 사이트에 지난 7일 등장했다. 군의관·공중보건의를 포함한 응급실 근무 의사 명단 공개와 함께 제보도 당부했다. 좁고 폐쇄적인 의사 사회를 감안하면 전공의·전문의들 이탈로 한계에 이른 상황에서 생명의 최전선을 지켜온 응급실 의사들의 압박감은 클 수밖에 없다. 일부 군의관들은 명단 공개 후 대인기피증까지 호소하고 있다고 한다.
정부는 강경 대응 방침을 내놓고 있다. 보건복지부가 9일 “용납할 수 없는 범죄”라며 경찰 수사를 의뢰한 데 이어 대통령실도 10일 “엄정 대응” 방침을 밝혔다. 대한의사협회도 응급실 블랙리스트 중단을 당부했다. 그러면서도 책임을 정부로 돌리며 수사 중단을 요구했다. 의협의 후안무치함에 말문이 막힌다.
‘응급의료법’ 2조는 응급환자를 ‘즉시 응급처치를 받지 아니하면 생명을 보존할 수 없거나 심신에 중대 위해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는 환자’로 규정하고 있다. 긴박한 생명 보호를 방해하는 것은 의사로서,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양식을 저버린 행위다. ‘참의사 리스트’ 등 블랙리스트 논란이 반복돼 왔지만, 응급의료 방해는 차원이 다른 문제다. 정부는 철저히 수사해 엄정한 처벌을 해야 한다. 사익을 위해 생명권 같은 기본권을 부정하고 공동체 안녕을 위협하는 반사회적 행태에는 관용 없는 대처가 불가피하다.
정치권이 ‘여·야·의·정 협의체’를 구성하며 중재에 나선 만큼 의료계도 ‘2025년 증원부터 원점 재검토’만 고집할 일이 아니다. 이미 입시 절차가 시작됐는데 되돌리라는 것은 불가능할뿐더러 또 다른 큰 혼란만 불러올 무책임한 요구다. 의료계는 책임 있는 논의를 통해 서둘러 대표기구를 구성하고 여·야·의·정 협의체에 참여하길 바란다. 국민들이 마지막 신뢰마저 접고 절망하는 일이 있어서야 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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