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교수 "정부 의료계획 없이 의대증원 의료파동 초래"

백영미 기자 2024. 9. 10.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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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계획 부재로 의사수 정확한 추계 불가"
"의사수 추계 없어 의정 모두 협상도구 없어"
"지역의료 붕괴 근본 원인도 의료계획 미비"
[서울=뉴시스] 이영환 기자 = 2025학년도 대입 수시 원서접수를 하루 앞둔 8일 서울 강남구 대치동 학원가의 의대 입시 관련 학원 앞을 한 시민이 지나가고 있다. 의료계에서는 일정을 미뤄 의대 증원 재검토를 하라고 주장하고 있다. 최근 여·야·의·정 협의체 구성을 논의하는 정치권에서도 비슷한 주장이 나왔는데 교육부는 불가능하다고 선을 그었다. 올해 수시가 시작돼도 의료계는 '2025학년도 의대 증원 재검토' 주장을 이어갈 것으로 보인다. 전공의와 의대생들은 정부가 2025학년도 정원을 재검토 하기 전에는 복귀할 뜻이 없다는 입장인 것으로 전해졌다.2024.09.08. 20hwan@newsis.com

[서울=뉴시스] 백영미 기자 = 정부가 의대 증원 등 의료개혁의 필요성을 강조하지만, 의료계획(보건의료발전계획)을 수립하지 않아 의대 증원에 따른 의료 공백 사태가 초래됐고 지역 의료가 붕괴됐다는 지적이 나왔다.

이규식 건강복지정책연구원장(연세대 보건행정학과 명예교수)은 대한의사협회(의협) 의료정책연구원의 주최로 10일 의협 회관 지하 1층에서 열린 의료정책포럼 '바람직한 의료개혁의 방향'에서 "지역·필수의료 붕괴의 원인이 된 의료계획 없이 의대 정원을 대폭 늘렸다"고 밝혔다. 내년도 의대 정원은 기존 3058명에서 약 50% 증원된 1509명을 합쳐 총 4567명이다.

보건의료발전계획이란 보건의료에 관한 인력, 시설, 물자, 지식 및 기술 등 보건의료자원의 관리를 말한다. 그러나 2000년에 제정된 보건의료기본법에 의거한 보건의료발전계획은 의대 증원 사태에 이르는 지난 24년간 단 한 차례도 수립된 바 없다. '보건의료 기본법 제3장 제15조'에 따르면 ‘보건복지부 장관은 관계 중앙행정기관의 장과의 협의와 제20조에 따른 보건의료정책심의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보건의료발전계획을 5년마다 수립해야 한다’고 돼 있다.

이 원장은 이날 '의료개혁의 올바른 방향'을 주제로 한 발표에서 정부가 의료계획을 수립하지 않아 의대 증원 사태가 발생했다고 진단했다.

그는 "의료계획이 없어 오늘날의 의료 파동(의대 증원 사태)을 초래했다"면서 "의료계획의 부재로 부족한 의사 수를 정확히 추계하는 것이 불가능하고, 정확한 의사 수 추계가 없는 상태이니 의사와 정부 양측 모두 협상의 도구가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지방의료 붕괴의 근본적인 원인도 의료계획의 미비로 의료정책 방향이 제대로 설정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이 원장은 밝혔다.

이 교수는 "정부는 1987년 7월 전국민의료보험과 함께 140개 중진료권과 8개 대진료권을 설정했지만 의료계획을 수립하지 않았다"면서 "진료권 설정과 진료의뢰체계라는 공급체계가 필요하고, 의료인력과 병상의 원활한 공급을 위해 의료계획은 필수"라고 말했다.

정부는 의료 불평등 문제가 대두되자 1995년 대진료권에 이어 1998년 중진료권도 폐지했고, 환자들은 수도권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특히 2004년 KTX 개통으로 수도권 쏠림 현상이 가속화됐고, 의료기관도 지방을 떠나는 환자를 따라 수도권으로 집중되기 시작하면서 지역 의료가 붕괴됐다.

이 원장은 또 ▲시혜적 차원의 복지혜택으로 설정한 건강보험제도 ▲의료비는 소득에 비례해 부담하고 부담액과 무관하게 모든 국민이 동일하게 의료 서비스를 이용하는 '의료 이용의 사회화' ▲의료기관의 영리화 ▲미국형 시장의료체계를 따라가는 의료정책 등을 이유로 들며 현행 건강보험제도를 유지하기 힘들다고 짚었다.

그는 "우리나라는 건강보험제도를 시혜적 차원의 복지혜택으로 설정했다"면서 "의료를 많이 이용하도록 부추겼고, 의료기관 당연지정제를 1979년 이래 지속하고 있고 보험료를 부자들에게 징벌적으로 과다 부과하고 있다"고 말했다. 요양기관 당연지정제란 어떤 의료기관에서 진료를 받더라도 건강보험 혜택을 누리도록 하는 제도를 말한다.

또 "2000년 건강보험을 통합하면서 국민건강보험법에 비급여를 인정하고, 비급여 가격은 의료법에 근거해 병원이 자율적 책정하도록 하면서 의료기관이 영리화됐다"면서 "2003년 이후 실손보험의 확산으로 과잉 진료가 남발하면서 의료기관의 영리화를 가속화시켰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의료기관 영리화의 부작용으로 진료과별 의사 수입의 격차가 발생했고, 비급여 제공이 어려운 소아청소년과, 산부인과 등 진료과의 인력 부족 문제가 생겼다"면서 "그러나 정부는 특정과 인력 부족의 원인 분석 없이 의사 인력 부족으로 치부해 의대 정원을 대폭 확대했고 의료 위기를 자초했다"고 말했다.

이 원장은 정부가 의료계획 없이 미국의 시장주의 의료정책을 시행하고 있는 것도 문제점도 언급했다. 미국의사회는 의료 이용의 사회화를 초래한다며 의료보장제도 전면 도입을 반대했고, 결국 일부 국민들을 대상으로 메디케어(노령층 의료보험)·메디케이드(한국식 의료급여)를 제한적으로 도입했다. 미국은 민영 보험 중심의 시장형 의료체계를 유지하고 있다.

이 원장은 "우리나라는 의료보장제도를 시행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건강보험이 적용되는 의료서비스를 공공재가 아닌 사적재화로 간주하는 미국의 시장주의 의료정책을 따라가고 있다"면서 "의료 서비스의 가격에 따라 수요는 계속 변동하고 있는데 의료계획은 부재하다"고 말했다.

그는 "2000년 건강보험 통합이라는 한국형 개혁은 재분배를 통한 형평이라는 이념이 우선돼 유럽의 개혁동향을 외면했다"면서 "지금이라도 원칙을 이해하고 점진적 개혁만이 건강보험제도의 붕괴를 방지할 수 있다"고 했다.

☞공감언론 뉴시스 positive100@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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