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미도에 생매장된 인민군 100명 발굴해 돌려줍시다”

고경태 기자 2024. 9. 10.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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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짬] 해군첩보부대 예비역중앙회 임형신 회장

해군첩보부대(UDU) 예비역중앙회 임형신 회장. 고경태 기자

“인천 월미도 동쪽 동굴 자리를 발굴해보고, 생매장됐던 그분들을 찾아 북한에 돌려줬으면 합니다.”

임형신(55) 해군첩보부대(UDU) 예비역중앙회장은 매년 9월 인천상륙작전 기념일이 다가오면 감회가 새롭다. 국군정보사령부 특수임무여단의 한 축인 해군첩보부대에서 복무했던 한 사람으로서 맥아더와 미국의 관점에 갇히지 않고 한국의 해군첩보부대원들이 작전에 기여한 사실을 알리는 데 앞장서왔던 터다. 그런 그가 최근 들어선 매년 9월15일 전후로 ‘인민군 유해’를 떠올린다고 했다.

지난해 3월22일 인천연구원 1층 대강당에서 열린 황해평화포럼 정책세미나 ‘인천상륙작전, 보수와 진보의 대화’에 토론자로 참여한 임 회장은 “미군의 함포사격과 지상 작전으로 월미산 동쪽 기슭에 생매장된 인민군 유해를 인도적 차원에서 발굴해 돌려줌으로써 남북경색 국면을 돌파해보자”고 말하기도 했다. 보수 쪽 토론자로서 파격 발언이었는데, 진보 쪽에서도 관심을 가지지 않아 아쉬웠다. 요즘도 기회 있을 때마다 이런 제안을 꺼낸다는 그는, 휴전 이후 대북 특수작전에 대한 훈장 추서에 인색한 정부에도 할 말이 많다고 했다. 인천상륙작전과 월미도 폭격일이 다가오는 6일 오전 인천 신포동 차이나타운에 있는 해군첩보부대 예비역중앙회 사무실에서 임 회장을 만나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월미도는 1950년 9월15일 인천상륙작전을 앞두고 10일부터 14일까지 미군 전폭기와 군함의 무차별 폭격대상이 돼 불바다로 변했다. 10일에는 월미도 동쪽 민간인 거주지에 폭탄(네이팜 탄)을 떨어뜨린 뒤 전투기를 이용한 기관총 사격이 이뤄졌고, 13~14일엔 10척의 군함이 월미도 720m 거리까지 다가가 월미도 서쪽 언덕의 요새에 함포사격을 가했다.

인천 월미도 월미공원 내 위치한 한국이민사박물관 및 월미산 지역. 이 인근 지역은 미군의 함포사격으로 인민군이 궤멸한 곳으로 추정된다. 고경태 기자

인천상륙 때 동굴 피신한 인민군들 투항 안하자 미군이 동굴 입구 메워
“유해 발굴, 남북경색 돌파구 될 수도”


인천상륙 당시 해군특수부대 활약
오늘 월미공원에서 전사자 추모식
“휴전 이후 대북공작도 훈장 줘야”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의 2008년 ‘월미도 미군폭격 사건’ 조사에 따르면, 1950년 9월10일 폭격에 따른 민간인 희생자는 100여명으로 추산됐다. 인민군 주둔지와 민간인 거주지역을 전혀 구별하지 않은 폭격의 결과였다. 13~14일 함포사격으로 월미도의 서쪽 절반 월미산 언덕에 땅굴을 파고 참호를 만들어 화력을 배치했던 인민군 제226독립해병연대 3대대 1개 포대와 제918야전공병연대 1개 포대 400여명의 병력이 궤멸됐다. 당시 해군첩보부대 작전을 지휘한 함명수 중령(7대 해군참모총장 역임)은 회고록 ‘바다로 세계로’(2007)에서 “인민군 400여명 중 108명이 전사하고, 136명이 포로로 잡혔는데, 이 중 100여명은 생매장됐다”고 썼다.

“미군 폭격으로 원주민들이 희생되고 고향을 떠나 돌아오지 못해 가슴 아픕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아무도 그곳에 묻힌 인민군을 기억해준 사람은 없었어요. 동굴 입구에서 투항을 권유해도 나오지 않자 미군이 불도저로 입구를 메워버렸죠. 74년이나 지났는데 이제 인권적 관점에서 그들에게도 눈을 돌릴 때가 되지 않았나요?” 당시 섬이었던 월미도는 간척으로 이젠 인천과 연결돼 있다. 임 회장은 지금처럼 남북관계가 꽉 막혀있는 때가 오히려 유해를 발굴하고 북으로 인도할 적기라고 주장하지만, 아직 귀 기울여주는 사람이 없다.

현실성도 문제이긴 하다. 정확한 매장지를 찾아내는 일은 둘째 문제다. 파주 적군묘지에 있는 인민군 유해도 북한은 아직 모셔가지 않았다. 국군 유해발굴 과정에서 인민군과 중공군(중국군)의 유해를 거둔 적은 있지만,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이 처음부터 인민군 유해를 목적으로 땅을 판 적은 없다. 다만 생매장됐음에도 잊혀진 그들의 이름을 처음으로 불러준 것만으로도 의미는 있다. 관심의 첫발을 뗐기 때문이다.

강원도 횡 성 출신인 임 회장은 고등학교 때 인천으로 건너왔다. 1989년 중국 전통무술인 우슈 국가대표로 선발돼 1990년 베이징 아시안게임 출전을 준비하던 중 군대 영장이 나왔는데, 우연히 해군첩보부대와 연을 맺었다. “수원 병무청에서 특수부대 가고 싶다고 했더니 공수특전단 등 여러 특수부대를 소개하는 자료를 보여주더라고요. ‘이게 다예요?’라고 하자 저를 살피고는 진짜 특수부대가 있다며 물색관에게 데려갔어요.” 그는 36개월 동안 외박·외출 한번 못 나오고 군 생활을 했다.

북파공작원 특수임무 동지회 전국연합 회원들이 2002년 3월15일 대통령 면담과 정부의 구체적 보상을 요구하며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앞 도로를 점거한 채 쇠파이프 등을 휘두르며 경찰과 맞서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현재 해군첩보부대 예비역중앙회에는 1200명의 회원이 가입돼 있다. 1948년 정부수립 이후 2002년까지 근무한 이들은 특수임무수행자보상에 관한 법률 등에 따라 모두 국가유공자로 인정받았다. 2002년 3월 대통령 면담과 정부의 구체적 보상을 요구하며 광화문에서 대규모 시위를 벌인 결과였다. 육군첩보부대(HID)까지 포함해 1951년부터 2002년까지 북파된 공작원은 1만1273명이며 7987명이 돌아오지 못했는데, 정부가 “그런 부대가 없다”는 식으로 나오자 총궐기했다.

임 회장은 1950년 8월24일 팔미도 남쪽 영흥도에 해군첩보부대가 제일 먼저 들어와 첩보작전을 시작했다며 인천상륙작전 전야의 활동을 설명했다. 17명으로 이뤄진 1개 팀이 영흥도에서 게릴라전을 하면서 시간을 끌고, 특수공작대를 월미도와 인천 쪽에 잠입시켜 인민군 병력에 대한 정보를 수집해 해군본부를 경유해 맥아더 사령부로 전달했다고 한다. 해군첩보부대 예비역중앙회가 매년 인천상륙작전 전승기념행사의 하나인 ‘해군첩보부대 전사자 추모식’에 정성을 들이는 이유다.

올해 추모식은 11일 9시반 월미도 월미공원 내 해군첩보부대 충혼탑에서 거행한다. 해군첩보부대 인천상륙작전 작전 전사자뿐 아니라 해군첩보부대 전체 전사자(450위)에 대한 추모식이다. 또한 민간인 희생자에 대한 추모의 마음도 갖는다고 한다.

임 회장은 정부에 섭섭한 이야기를 마지막으로 꺼냈다.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까지의 첩보부대 전사자에 대한 훈장 추서를 요청했지만 한국전쟁 기간까지만 해준다며 거절당하고 있습니다. 훈장도 주지 않으면서 휴전협정 이후에도 왜 부대를 존치하고 대북 특수작전을 수행케 했는지 묻지 않을 수 없어요.”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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