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Saving Lives, 적십자가 동행합니다] ⑤‘어렵게 온 한국인데’…가정폭력에 생활비 걱정까지

김은진 기자 2024. 9. 10.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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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폭력에서 겨우 벗어났는데, 생활비 걱정으로 하루하루가 막막합니다."

지난 2011년 열아홉 살이었던 한정희씨(가명·31·여)는 북한 함흥에서 중국, 라오스, 태국을 거쳐 한국으로 왔다.

한씨는 "아이들에게 든든한 울타리가 돼 주고 싶다"며 "세 식구가 기본적인 의식주만이라도 걱정없이 살아가는 게 가장 큰 바람"이라고 말을 잇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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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1년 북한에서 한국으로 넘어온 한정희씨(가명·31·여)가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다. 전 남편의 가정폭력에서 벗어났지만 경제활동을 할 수 없어 생활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대한적십자사 제공

 

“가정폭력에서 겨우 벗어났는데, 생활비 걱정으로 하루하루가 막막합니다.”

지난 2011년 열아홉 살이었던 한정희씨(가명·31·여)는 북한 함흥에서 중국, 라오스, 태국을 거쳐 한국으로 왔다. 북한이탈주민정착지원시설인 하나원에서 지낸 후에 휴대폰 필름 공장에 취직해 행복한 한국 생활을 키워갔다. 그러던 중 하나원에서 알게 된 같은 또래 북한 청년과 결혼을 해 가정을 꾸리게 됐지만 그때부터 불행은 시작됐다.

한씨는 남편의 가정 폭력으로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야 했다. 폭언은 물론이고 협박과 폭행을 일삼는 남편과 살 수 없다는 생각에 매일 도망치기 일쑤였다. 결국, 경찰의 도움으로 지난 2020년 남편과 이혼할 수 있었다.

매일이 고통이었던 결혼 생활을 정리하고 후련한 마음도 잠시, 갑자기 들이닥친 코로나19는 한씨를 더 큰 불행으로 밀어 넣었다. 혼자서 아이들을 책임져야 했던 한씨는 잠을 줄여가면서까지 일을 했지만 코로나19로 일자리를 모두 잃게 됐다. 기초수급생활비를 신청했지만 바로 직전 경제활동을 했던 탓에 생계비와 주거비도 온전히 다 받지 못했다.

당시 교회에서 쌀과 생필품, 월세 등을 지원해 준 덕분에 간신히 생계를 이어갈 수 있었지만 여전히 그의 삶은 처참했다. 한씨는 내일이 오는 게 두렵고 아침이 밝아 오는 게 무서웠다. 전 남편의 폭행으로 인한 후유증 탓인지 환청에 시달렸고 잠도 이루지 못했다.

한정희씨(가명·31·여)에게 도움을 주실 분들은 QR코드로 접속하시면 후원에 참여하실 수 있습니다.

그때마다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던 것은 열 살 아들과 8개월 딸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가혹했다. 한 달에 50만원이 훌쩍 넘는 딸아이의 분유값에 분유 한 통으로 일주일을 버텨야 했고 20만원조차 쓸 수 없어 아들의 교육비를 줄여야 했다. 매달 나가는 월세 50만원까지 하면 세 식구가 생활비로 사용할 수 있는 돈은 단 30만원뿐이다.

한씨는 “아이들에게 든든한 울타리가 돼 주고 싶다”며 “세 식구가 기본적인 의식주만이라도 걱정없이 살아가는 게 가장 큰 바람”이라고 말을 잇지 못했다.

대한적십자사 경기도지사 관계자는 “아이들을 돌봐야 하기 때문에 당장 한씨가 경제 활동도 할 수 없는 상황”이라며 “세 가족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움의 손길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김은진 기자 kimej@kyeong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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