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부역자들의 상식과 반상식
암세포도 암세포로서 의견이 있다. 그러나 암세포의 의견을 그대로 두면 몸 전체가 암세포에 잡아먹힌다. 암세포 같은 반상식이 발호한다. 일제 부역자의 후예들이 선조들을 대신해 제2의 반역에 나선 꼴이다. 반상식이 상식 노릇을 하면 공동체의 윤리성은 존립의 토대를 잃는다. 윤리가 죽은 공동체는 공동체로서도 죽는다
고대인들은 우주의 크기가 얼마나 된다고 생각했을까? 로마 철학자 보에티우스(470~524)가 쓴 ‘철학의 위안’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네가 천문학자들의 가르침에서 배웠듯이, 지구의 크기는 우주의 크기에 비하면 한 점에 지나지 않는다. 지구는 우주 전체와 비교하면 사실상 크기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보에티우스는 서로마제국 멸망 이후에 살았던 인물이다. 476년 서로마의 마지막 황제가 게르만족 용병대장 오도아케르에게 폐위당하고, 오도아케르도 489년 고트족 지도자 테오도리쿠스에게 패배했다. 로마 귀족 출신이었던 보에티우스는 이 혼란기에 테오도리쿠스의 왕국에서 행정장관으로 봉직했다. 그러나 곧은 성품이 화를 불렀다. 보에티우스는 반대파의 음모에 휘말려 반역죄를 뒤집어쓰고 사형 선고를 받았다.
‘철학의 위안’은 사형을 당하기 전 유배지에서 쓴 마지막 저작이다. 이 글에서 보에티우스에게 지구의 크기가 얼마나 작은지 이야기해주는 이가 ‘철학의 여신’이다. 여신은 이 지구가 광대한 우주에 비하면 먼지만도 못한 것임을 상기시킨 뒤, 그 티끌 같은 곳에 갇혀서 명예니 영광이니 하는 것을 추구하는 삶이 얼마나 보잘것없는지 생각해보라고 말한다.
보에티우스의 이런 우주적 상상력은 긴 세월에 걸친 천문학 발전이 가져다준 것이었다. 그 1000년 전에 살았던 그리스 철학자 아낙시만드로스(기원전 610~546)는 신화적 우주관에서 벗어나 태양을 거대한 물질 덩어리로 보았다. 지구와 태양 사이의 거리를 처음으로 따져본 사람도 아낙시만드로스였다.
아낙시만드로스는 이런 생각도 했다. ‘태양과 달과 별이 우리를 돌고 있는데, 그렇다면 이 지구 아래는 비어 있어야 할 것이다. 지구는 단단한 것 위에 놓여 있지 않고 공중에 떠 있음이 틀림없다.’ 기원전 4세기에 이르면 지구가 공중에 떠 있다는 생각은 최소한 철학자들에겐 낯설지 않게 됐다.
아리스토텔레스(기원전 384~322)도 지구가 둥근 물체임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천체론에서 달과 태양과 행성과 항성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우주는 지구를 중심으로 하여 돈다.
두어 세대 뒤에 살았던 아리스타르코스(기원전 310~230)는 아리스토텔레스보다 한층 더 과감한 생각을 했다. 이 불세출의 천문학자는 상현달일 때 지구-달-태양이 이루는 삼각형의 내각이 직각에 가깝다는 사실을 관측해 태양이 지구로부터 까마득히 멀리 떨어져 있다고 계산했다.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태양의 크기가 달의 크기와 같게 보인다면, 태양은 달과는 비교할 수 없이 클 뿐만 아니라 지구보다도 훨씬 크다.
이 추측은 다음과 같은 생각을 불러일으켰다. “큰 것(태양)이 작은 것(지구) 주위를 도는 것은 불합리하다.” 이 생각을 밀어붙여 아리스타르코스는 태양이 지구를 도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태양을 돈다는 결론을 내렸다. 아리스타르코스의 생각은 너무나 과감한 것이어서 당대인들에게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보에티우스가 생각한 우주는 지구를 중심에 두고 천체들이 회전하는 아리스토텔레스적 우주였다.
아리스타르코스의 생각은 1700년 뒤에야 재발견됐다. 16세기 천문학자 코페르니쿠스는 아리스타르코스의 생각을 이어받아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는 태양중심설을 내놓았다. 100년 뒤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정교한 논리와 언어로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설을 우주의 법칙으로 세웠고, 이어 아이작 뉴턴은 천체 사이에 작용하는 인력이 이 모든 우주의 질서를 이끄는 원리임을 증명했다. 아리스타르코스의 천문학적 세계관은 마침내 계몽 이성의 상식이 됐다.
그러면 상식(common sense)이라는 말은 어디서 왔을까. 이 말의 뿌리를 캐들어가 보면 다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이른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영혼론’에서 시각·청각·촉각·후각·미각의 다섯가지 감각을 통합해 사물을 인식하는 능력을 가리켜 ‘공통감각’(koine aisthesis, 코이네 아이스테시스)이라고 불렀다. 감각은 따로따로 작용하기도 하지만 힘을 모아 함께 작용하기도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쓸개즙을 사례로 든다. 우리는 쓸개즙을 보고 ‘맛이 쓰고 색이 노랗다’고 말한다. 미각과 시각이 함께 작용해 쓸개즙을 쓰고 노란 것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공통감각이 발달하는 이유를 사물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려는 우리의 본성에서 찾았다. 만약 우리에게 미각이 없다면 설탕과 소금을 구분하기 어렵다. 시각이나 촉각만으로는 눈앞에 있는 하얀 것이 설탕인지 소금인지 알 수 없는 것이다. 공통감각을 통해 우리는 사물의 실상을 제대로 알 수 있다.
3세기 뒤 로마 철학자 키케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공통감각 곧 ‘코이네 아이스테시스’를 라틴어 ‘센수스 코무니스’(sensus communis)로 옮기면서 여기에 ‘공동체 감각’이라는 의미를 더했다. 이 ‘센수스 코무니스’에서 근대의 상식(common sense)이 나왔다.
상식이란 공동체 안에서 통용되는 공통의 감각이며, 공동체가 공유하는 공동의 의견이고, 공동체가 함께하는 윤리적 판단력이다. 공동체의 윤리적 판단력이라는 이 상식의 의미가 18세기에 이르러 스코틀랜드 상식학파를 낳았다.
바로 이 ‘상식’을 손에 쥐고 정치적 변혁을 주창한 사람이 18세기 영국 출신 사상가 토머스 페인(1737~1809)이다. 자유·평등·독립의 근대 이념을 신봉한 페인은 1776년 ‘상식’이라는 소책자를 써 미국 독립전쟁에 불을 질렀다. ‘상식’을 출판하고 여섯달 뒤에 나온 ‘독립선언’은 페인이 이 소책자에서 주장한 것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이나 다를 바 없다.
페인이 말하는 ‘상식’은 인간이 이성으로 인식한 세상의 보편적 질서를 뜻하며, 더 좁혀서 말하면 인류가 수천년에 걸쳐 축적하고 갈릴레오와 뉴턴이 확고한 법칙으로 세운 자연의 원리를 가리킨다. 페인은 말한다. “나는 국가의 형태에 대한 내 생각을 자연의 원리에서 끌어냈다.” 아메리카 독립의 당위와 필연을 역설하면서는 이런 비유를 끌어들인다.
“대륙이 영구히 섬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고 가정하는 것은 너무나 불합리하다. 자연을 보라. 위성이 그 행성보다 큰 경우는 어디에도 없다. 영국과 아메리카의 관계도 그런 자연의 질서를 뒤집을 수는 없다.”
여기서 저 고대 아리스타르코스의 천체론이 페인의 ‘상식’이 돼 정치적 주장을 떠받치는 토대 구실을 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 자연의 원리 곧 상식의 이름으로 페인은 단언한다.
“자연이 용서할 수 없는 침해행위가 있다. 그런 침해행위를 용서한다면 그것은 자연일 리가 없다. 사람이 자신의 연인을 강탈한 자를 용서할 수 없듯이, 대륙은 영국의 살인자들을 용서할 수 없다.” 페인의 상식론은 대륙이라는 커다란 위성이 섬이라는 작은 행성에서 떨어져 나가 독립하는 데 결정적으로 이바지했다.
페인의 이 상식론을 받아들인다면 인도와 같은 거대한 땅이 영국이라는 작은 섬의 지배를 받는 것도 상식의 이름으로 반대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19세기 이후 영국인 대다수는 그런 생각을 상식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어떤 사람들에게 상식인 것이 다른 어떤 사람들에게는 상식이 아닐 수도 있다. 인도인들에게 ‘독립’은 상식이었지만, 영국의 식민주의자들에게는 ‘지배’가 상식이었다.
일제강점기 한반도의 경우도 다르지 않다. 나라를 팔아 권세를 얻은 자들에게는 일본의 지배가 상식이었지만, 일제의 강압적 침탈을 견딜 수 없었던 한반도 민중과 항일운동가들에게는 일본의 패망과 조선의 독립이 상식이었다. 부역자 무리에 속해 있느냐 저항자 집단에 속해 있느냐에 따라 세상을 보는 감각이 달라진다.
상식은 분명히 공동체가 공유하는 공동의 판단력이다. 그러나 일제 부역자들의 상식은 부역자 내부의 공통감각일 수는 있지만 공동체 전체의 윤리적 공통감각일 수는 없다. 부역자들의 감각은 공동체 전체로 보면 반공동체적 감각이고 반윤리적 감각이며 반상식이다.
그러므로 모든 센스, 모든 판단, 모든 의견이 다 존중받을 수는 없다. 몸을 파괴하는 암세포도 암세포로서 의견이 있다. 그러나 암세포의 의견을 그대로 두면 몸 전체가 암세포에 잡아먹힌다. 그 암세포 같은 반상식이 권력의 위세를 업고 발호한다. 일제 부역자의 후예들이 선조들을 대신해 제2의 반역에 나선 꼴이다.
반상식이 상식 노릇을 하면 공동체의 윤리성은 존립의 토대를 잃는다. 윤리가 죽은 공동체는 공동체로서도 죽는다. 상식을 희롱하고 공동체를 모욕하는 반공동체 세력을 공적 공간에서 퇴출하는 것이야말로 이 시대의 상식이다.
고명섭 | 책지성팀 선임기자
‘하이데거 극장-존재의 비밀과 진리의 심연’(1, 2), ‘니체 극장-영원회귀와 권력의지의 드라마’, ‘생각의 요새’, ‘광기와 천재-루소부터 히틀러까지 문제적 열정의 내면 풍경’, ‘지식의 발견-한국 지식인들의 문제적 담론 읽기’, ‘이희호 평전-고난의 길, 신념의 길’을 썼다. 카이로스는 때·시기·기회를 뜻하며 현재를 밝히는 순간의 섬광을 가리킨다. 카이로스의 눈으로 철학·사상·역사를 포함한 인문학을 탐사하며 우리 시대와 대화한다.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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