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빚 내서라도 따라잡자"…美·中에 뒤처진 EU의 '최후 통첩'
실존적 위험에 직면한 유럽연합(EU)의 글로벌 경쟁력을 되살리기 위해 '공동의 빚'을 내서라도 산업전략을 탈바꿈해야 한다는 경고가 나왔다. 반면 민간에서는 유럽 당국의 지나친 관료주의가 산업 경쟁력을 갉아먹고 있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미국은 기업들에 인센티브를 주는 데 반해 유럽은 규제로 옭아매고 있다는 비판이다.
"2차 대전 때보다 심각한 유럽"
마리오 드라기 전 유럽중앙은행(ECB) 총재(사진)는 9일(현지시간) 벨기에 브뤼셀에서 'EU 경쟁력의 미래' 보고서를 공식 발표하며 이같이 밝혔다. 이탈리아 출신인 드라기 전 총재는 유럽 재정위기 당시 과감한 대규모 통화 완화 정책으로 유로존(유로화 사용 국가들, 현재 20개국)의 위기 전이를 막아내 '슈퍼 마리오'로 불리는 경제통이다. 328쪽 분량의 이번 보고서는 드라기 전 총재의 주도로 EU 관계 기관들이 대거 참여해 작성했다.
보고서는 EU가 미국, 중국과 경쟁하기 위해서는 연간 최대 8000억 유로(약 1188조원)의 신규 투자가 뒷받침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현재 EU 국내총생산(GDP)의 4.7%에 달하는 규모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유럽 재건 원조 계획인 '마셜플랜' 규모는 당시 유럽 경제 규모의 약 2% 수준이었다. 로이터통신은 "이번 보고서는 전후 폐허가 됐을 때보다 2배 이상의 공격적 투자가 필요하다고 제언한 것"이라고 전했다.
특히 민간부문 투자만으로는 부족하다며 회원국의 공동 부채 방안도 언급됐다. 드라기 전 총재는 "회원국 간 공동 투자 프로젝트를 활성화하고 자본시장 통합을 지원하기 위해서는 정기적으로 공동 안전자산을 발행하는 쪽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제안했다. 자금 조달을 위해 유로존 국가들이 연대 보증을 통해 공동 명의로 발행하는 채권인 유로본드의 적극적인 발행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최근 미·중 갈등으로 더욱 심각해지고 있는 보호무역주의에 관한 지적도 담겼다. 보고서는 "보호무역주의를 피해야 한다"면서도 "개방 무역 시대가 저물고 있다"며 대응 필요성을 언급했다. 구체적으로 "탈탄소화와 경쟁력 관련 공동 계획을 추진할 때에는 공평한 글로벌 경쟁환경과 역외에서 국가 지원을 받는 (업체들과의) 경쟁을 상쇄하기 위해 방어적 무역 조치가 수반돼야 한다"고 말했다.
탄소국경조정제도(CBAM) 등 EU 역외 기업들을 겨냥한 일종의 탄소세에 대해 보완책이 마련돼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했다. CBAM은 철강 등 6개 품목을 EU로 수출하는 역외 기업이 제품을 생산하는 과정에서 나오는 탄소 배출량 추정치를 계산해 일종의 세금을 부과하는 제도다. EU는 해외 기업의 반발을 고려해 CBAM이 본격 시행되는 2026년부터 EU 기업들에 제공해온 '배출권(ETS) 무상 할당'을 단계적으로 폐지할 예정이었으나, 시장 상황을 고려해 역내 기업들에 대한 혜택을 계속 유지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글로벌 수요가 급증한 반도체와 관련해서는 새로운 'EU 반도체 전략' 수립도 주문했다. EU 예산을 통한 반도체 부문 공동 지원, 신규 사업 패스트트랙 승인을 비롯해 역내 공동·민간입찰 사업 촉진을 위한 'EU 반도체 인증제도' 신설 등이 제시됐다. 드라기 전 총재는 "유럽의 경쟁력 쇠락을 막으려면 개혁이 '급진적'으로 이뤄져야 한다"면서 "복잡한 EU의 의사결정 구조도 개혁하고, 집단적인 힘을 발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날 보고서는 우르술라 폰데어 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이 지난해 9월 연례 정책연설에서 경쟁력 강화 방안을 연구해달라고 공식 의뢰한 것에 대한 결과물이다. 이날 제안 중 일부는 오는 11월 출범하는 '폰데어 라이엔 2기'의 정책 수립에 일부 반영될 것이란 전망이다.
"바보야, 문제는 규제야"…기업들의 반발
반면 이날 블룸버그통신은 EU 당국자들의 시각과는 다른 측면을 지적하는 패트릭 푸얀 토탈에너지 최고경영자(CEO·사진)의 인터뷰를 보도했다. 토탈에너지는 유럽에서 셸의 뒤를 이어 두 번째로 큰 에너지 기업이다. 푸얀 CEO는 "EU의 지나친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기준이 미국 최대 에너지 기업 엑슨모빌과 유럽 에너지 기업들의 시가총액 격차를 더욱 벌리고 있다"고 말했다.
ESG 규제가 경쟁력과 시총 측면에서 유럽 기업들을 미국 기업들보다 불리하게 만들고 있다는 비판이다. 메르세데스 벤츠, 유니레버 등도 최근 당국의 과도한 환경 규제에 반발하고 있다고 블룸버그는 전했다. 유럽 산업체 회의는 최근 "엄격한 규제가 경쟁력 상실을 가속화하고 있다"며 "회원사들의 사업 전망은 유럽 외부에서 더 나아질 것"이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특히 에너지 집약적 산업에 대한 규제가 과도하다는 지적도 나왔다. 유럽의 많은 유관 기업들이 포춘 글로벌 500 명단에서 제외됐고, 2000년 30%에 달했던 유럽의 글로벌 알루미늄 생산 비중은 2년 전 5%까지 떨어졌다. 블룸버그는 "드라기 전 총재의 EU 경쟁력 보고서도 역외 기업들이 유럽 기업들만큼 엄격한 규제를 받고 있지 않고 오히려 국가적 지원을 받고 있다는 점을 언급한 것"이라고 전했다.
유럽 당국자들은 2019년부터 환경 규제가 급속도로 진행됐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기후 위기 대응을 위해 불가피하다는 입장이다. 유럽이 규제를 늘리는 사이 미국은 초대형 인센티브를 공약한 인플레이션감축법(IRA) 등을 제정해 유럽 기업들의 투자를 유치하고 있다. 뱅크오브아메리카 글로벌 리서치에 따르면 미국에서 2022년 IRA가 통과된 후 현재까지 60개 이상의 유럽 및 아시아 기업들이 미국 투자를 발표했다. 노르웨이 배터리 제조사 프레이어는 아예 본사를 미국으로 옮기기로 했다.
김리안 기자 knra@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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