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꼬붕’ ‘빌런’ ‘또라이’라는 국회 [김지현의 정치언락]
“여야 의원 여러분, 제가 국민들부터 자주 듣는 얘기가 있습니다. ‘국회의원들은 우리보다 많이 배우고 잘난 사람들 아닌가. 그런데 정치인들은 우리 같은 사람도 잘 안 쓰는 막말을 마구 하더라. 그런 사람들이 우리 국민의 대표라니 창피하다’. 얼마 전 민생 현장을 방문했을 때도 비슷한 얘기를 또 들었습니다. 차마 얼굴을 들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 정치가 언제까지 이런 소리를 들어야 합니까?”
국민의힘 추경호 원내대표는 5일 22대 국회 첫 교섭단체 대표 연설에 나서 ‘국회의원 윤리실천법’, 이른바 ‘막말 금지법’ 제정을 제안하며 이같이 호소했습니다. 국민의 대표라는 사람들이 민의의 전당인 국회에서 서로를 향해 폭언을 쏟아내는 점을 지적하며 윤리 규범을 강화하자는 거죠. 영국이나 미국 의회처럼 서로를 향한 증오 표현은 아예 법으로 막고, 독일 의회처럼 모욕적 발언을 하는 경우엔 면책특권도 적용하지 말자는 겁니다.
추 원내대표는 “여러 군데 분산돼 있는 윤리 규정을 통합하고, 추상적이고 선언적인 윤리 규정을 구체화해서 법으로 만들자”라면서도 “그래서 명예를 훼손하는 막말과 폭언, 인신공격, 허위 사실 유포, 근거 없는 비방, 정쟁을 겨냥한 위헌적인 법률 발의를 하는 나쁜 국회의원들은 강하게 제재합시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정쟁을 겨냥한 위헌적인 법률 발의를 하는 나쁜 국회의원’은 사실상 더불어민주당 의원을 지칭한 공격이죠. 결국 서로 말을 조심하자고 외치는 그 순간에도 민주당 의원석에선 고성과 야유가 터져 나왔습니다.
전날 민주당 박찬대 원내대표의 연설할 때도 여야 의원석에선 서로를 향한 유치하기 짝이 없는 비난과 조롱이 이어졌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은 헌법을 준수하고 있습니까”라는 박 원내대표의 말에 여당은 “네”라고, 야당은 “아니오”라고 외쳤습니다. 박 원내대표가 “대통령은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라고 외치자, 야당은 “아무거도 안 해요!”라고 답하고, “말과 행동이 전혀 다른 표리부동, 격노할 줄만 알았지 책임질 줄은 모르는 무책임”이라고 정권을 비판하자 여당 의원석에선 “민주당 얘기 그만하세요”라는 조롱이 터져 나왔습니다.
당장 추 원내대표가 국회의원 윤리실천법이라도 만들자고 호소하던 그날 오후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전체회의는 “꼬붕”과 “빌런”의 공방 속 파행됐습니다.
“여당 위원들이 전날 기자회견에서 저를 ‘빌런’이라고 비난했는데 상당히 모욕적이다. 빌런의 사전적 개념을 찾아봤는데 ‘악당’, ‘악한’, ‘악인’, ‘범죄자’다. 매우 불쾌하고, 그런 악당 위원장과 함께 회의를 하는 여러분은 악당의 꼬붕인가.”(정청래 법사위원장)
국민의힘은 민주당이 발의한 세 번째 채 상병 특검법이 전날 법사위 전체 회의에 야당 단독으로 상정되자 이에 반발하며 정 위원장을 ‘빌런’이라 지칭했죠. 정 위원장은 “진정한 대한민국의 악당은 헌법 정신을 부정한 윤석열 대통령”이라고도 했습니다. 이날 야당 법사위원들은 “국민의힘 의원들의 사과와 재발 방지 약속이 없으면 정상적으로 회의를 진행할 수 없다”고 했고, 결국 심우정 검찰총장 후보자 인사청문 경과보고서 논의는 해보지도 못한 채 불발됐습니다.
비슷한 시각 열린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전체 회의장에서는 ‘나치’ 발언을 둘러싼 여야 간 설전이 한창 이어졌습니다.
“(독일 나치 선전 선동의 대가 괴벨스 발언 중) ‘거짓말도 매일 말하면 진실이 된다’는 말이 이다. 야권의 선전 선동이 나치의 방식과 비슷하다, 여기서 배워오지 않았나, 이런 의심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국민의힘 엄태영 의원)
“야당에 대한 모독이라고 생각한다. 엄태영 의원의 이 발언과 PT 자료에 대해 삭제를 요청하고 아울러 사과의 말씀을 요청드린다.”(민주당 허영 의원)
“나치는 척결과 타도의 대상이다. 공식 석상에서 민주당을 이렇게 폄훼한다면 어떻게 더 회의를 진행하겠느냐.”(민주당 김영진 의원)
앞서 대통령실도 지난 2일 공식 브리핑에서 이 대표가 최근 당 대표 회담 모두발언에서 ‘계엄령’을 언급한 것에 대해 “나치, 스탈린 전체주의의 선동정치를 닮아 가고 있다. 근거가 없다면 괴담 유포당, 가짜뉴스 보도당이라고 불러도 마땅하다”고 맹폭한 바 있죠. 유럽 등 서구권에선 나치식 경례 동작 및 상징물은 물론이고, 상대방을 나치에 비유하는 것도 금기시됩니다. 왜 먼 나라 한국 땅의 정치인들이 서로를 향해 나치라고 저격하는지 독일 사람들이 들으면 황당할 듯 합니다.
이번주에 이 대표는 나치 뿐 아니라 레닌에도 비유됐었죠.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느라 바쁜 한 주였네요.
저질 막말과 폭력이 난무하는 22대 국회를 두고 누군가는 자극적인 유튜브 탓을, 또 누군가는 강성 지지층 탓을 합니다. 그런데 사실, 어디서 굳이 원인을 찾을 것도 없습니다. 서로 면전에서 그런 말을 서슴없이 한다는 것 자체가 사회 생활을 위한 최소한의 기본이 안 된 사람들인 겁니다. 보통 초등학생들에게 “아무리 화가 나도 친구에게 욕을 하면 안 돼요”라고 가르치죠. 심지어 요즘 초등학교에서도 막말을 하면 즉각 ‘폭력’으로 간주돼 학교폭력대책자치위원회가 열리고 징계가 내려집니다.
국회의원들에게 품위까진 바라지도 않습니다. 다만 적어도 최소한의 사회규범만이라도 지키자는 겁니다. 왜 국민 세금으로 월급받으면서 수준 이하의 폭력적 장면만 보여주는 겁니까.
김지현 기자 jhk8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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