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궁일생? 일궁일사! [소소칼럼]
경기에 몰입하던 중 갑자기 지-잉 울리는 휴대전화. “움직임이 없는 휴식 상태에서 심박수가 10분 동안 120bpm 보다 높으니…” 나의 건강에 짤막하게 우려감을 드러냈다. 돌이켜 보면 그 당시 ‘무호흡’ 상태로 눈만 이 스크린 저 스크린 데굴데굴 굴리는 중이었다. 경기장에는 그 누구 하나 달리거나, 슛을 쏘거나, 공을 치는 사람이 없었다. 정확히는 일어서 있는 사람이 없었다. 선수들의 손가락, 마우스, 키보드 그리고 화면만 바쁘게 움직일 뿐이었다.
8일 경주 실내체육관에서 열린 2024 LoL 챔피언스 코리아(LCK) 서머 결승전 우승의 영광은 한화생명e스포츠(HLE)에게 돌아갔다. 전신 ROX 타이거즈의 2016년 서머 우승 이후 2941일 만이다. 아버지가 한화 이글스의 오랜 팬이라는 이유로 6살 때부터 그 길을 함께 걸었다. 야구가 안 풀리는 날에는 ‘또 다른 한화’의 성적을 확인하며, 5등 안에만 있어도(현재 LCK에는 10개 팀이 있다) 묘한 위로를 받으며 떠나곤 했다. 그러다 올해부터, 아무튼 갑자기 챙겨보게 됐다. 정작 게임은 한 번도 안 해봤지만 말이다.
야구에 ‘일구일생, 일구일사(一球一生, 一球一死)’이란 말이 있다면 이날 결승전은 ‘일궁일생, 일궁일사’였다. 첫 세트, 어느덧 40분대까지 진입한 게임. 3천 골드 차이까지 벌린 젠지는 어느덧 HLE 진영 억제기까지 밀고 들어왔다. 젠지의 세트 승이 목전까지 다가온 셈이다.
바로 그 순간, 내 바로 옆 또 다른 기자(나중에 물어보니 한화 팬이셨다)가 들고 있던 카메라를 잠시 책상 위에 내려놓고 손을 모아 기도하기 시작했다. 프레스 밑 구역 HLE 응원석 내 팬들도 마찬가지였다. 일부는 스크린을 못 쳐다보겠다는 듯이 얼굴을 돌리며 서로를 안고 있었고, 누군가는 손을 맞잡은 채 연신 선수들의 이름을 외쳤다. 아무 소리도 지르지 못하며 스크린과 물아일체(物我一體) 상태에 빠진 팬도 있었다. 반대편에서 들려오는 함성도 점차 거세졌다. ‘막아 안돼 궁 써 제발 한 타만 더 거의 다 했어 가자 이기자.’ 양측 팬들의 소리가 섞여 분간조차 되지 않았다. 결과는 HLE의 승리.
e스포츠 팬들이라면 누구나 가슴 한편에 서사를 키우고 있다. 정확한 날짜는 몰라도 처음 e스포츠에 빠지게 된 경기, 그날의 상대 팀과 선수가 했던 캐릭터(롤의 경우 챔피언)는 정확히 기억한다. 전날 HLE과 T1의 준결승전에서 만난 HLE 정글 ‘피넛’ 선수의 한 오랜 팬은 이름을 묻자 대신 피넛 선수의 ROX 시절 유니폼을 꺼내 보였다. ROX의 막내였던 선수는 어느덧 팀의 주장이 돼 돌아왔다. 8년 전 팀의 서머 우승의 순간을 함께 했던 팬 역시 여전히 이 자리에 그대로다. “SKT와의 경기에서 피넛 선수가 앨리스를 너무 잘하는 것을 보고 팬이 됐는데 벌써 8년이네요. 긴 시간 동안 e스포츠가 하루하루 일상의 빈틈을 채워줬어요”라고 팬은 말했다.
20년 넘게 한 팀을 응원한 팬도, 올해 처음 LCK를 시청하게 된 팬도 다 같은 팬이다. 장현우 씨는 동양 오리온 시절부터 e스포츠를 보기 시작했다. 2003년 8월 15일 임요환 선수와 도진광 선수의 치열한 혈투를 잊지 못하는 장 씨는 지금도 T1의 경기를 챙겨본다. “광안리에서 무료 대회를 열던 시절이 기억나는데 이젠 유료 관중에 매진까지…세상이 많이 변했네요”하고 장 씨는 웃었다. 젠지의 팬이라고 밝힌 전유진 씨는 남자친구 때문에 올해 첫 ‘롤 덕질’을 시작했다. 결승전 당일에는 직접 젠지 미드 ‘쵸비’ 선수의 얼굴이 담긴 부채를 제작해 팬들에게 ‘무료나눔’을 진행했다. 정작 남자친구는 라이벌 T1의 팬이다.
결승전 당일, 경기장 주변에 유독 많이 보였던 부녀(父女)지간. 아빠 손을 잡고, (아마 100%) 아빠가 응원하는 팀의 응원 도구를 흔들며 아무것도 모른 채 방방 뛰는 소녀들. 10년 후쯤 “아빠가 그 팀만 응원을 안 했어도!” 하며 울고 웃는 날이 그들에게도 있지 않을까.
[소소칼럼]은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나 소소한 취향을 이야기하는 가벼운 글입니다. 소박하고 다정한 감정이 우리에게서 소실되지 않도록, 마음이 끌리는 작은 일을 기억하면서 기자들이 돌아가며 씁니다.
김수현 기자 news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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