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가 미래다]⑥ ‘원전 가동’ 보고하니 “너 죽을래”… 정치판 된 에너지 계획
“에너지는 정파 없어… 장기적 관점서 봐야”
“에너지 정책 만들었다고 사무실 압수수색 당하고 담당했던 공무원이 구속되면 누가 무서워서 일하겠습니까.”
산업통상자원부 출신의 한 고위 간부는 “국가 안보와 직결되는 에너지에는 정파가 없다. 올바른 전력수급기본계획(전력계획)을 수립하기 위해서는 여야 구분 없이 장기적인 관점에서 봐야 한다”고 말했다.
산업부가 지난 5월 신규 원전을 추진하는 내용을 담은 11차 전력계획 실무안(2024∼2038년 적용)을 발표하자 야당은 즉각 반발했다. 더불어민주당은 지난 6월 전력계획 수립·변경 시 국회 상임위원회의 동의를 받아 확정하도록 하는 내용을 담은 전기사업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당대표는 “걱정되는 내용이 많다”며 11차 전력계획의 전면 재검토를 요구하고 있다.
11차 전력계획 실무안은 2038년까지 국내 생산 전기의 70% 이상을 ‘무탄소 전기’로 채우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최대 3기의 원전을 신규 건설하고, 차세대 원전으로 개발 중인 소형모듈원자로(SMR) 1기도 2035년까지 투입한다. 또 신재생에너지의 양대 축인 태양광과 풍력 발전 설비를 2038년까지 현재의 3배 수준으로 늘리는 방안도 담겼다. 실무안은 2038년 국내 최대 전력수요를 129.3GW(기가와트)로 봤다.
정부가 11차 전력계획을 발표하자 야당은 10차 때와 마찬가지로 전면 재검토를 요구하고 나섰다. 이 대표는 지난 5월 최고위원회의에서 “신규 원전 4기를 건설하겠다는 구상도 밝혔는데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는다”며 “재생에너지 없이는 기후위기 대응도, 경제의 지속 발전도 불가능하다. 특히 높아지는 RE100의 파고에 도저히 맞설 수 없다”고 했다. RE100은 기업이 사용하는 전력 100%를 재생 에너지로 충당하겠다는 캠페인이다.
정진욱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은 전기사업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현행 전기사업법은 산업부 장관이 2년마다 전력계획을 수립하고 수립·변경 시에 관계 중앙행정기관의 장과 협의하고 공청회, 전력정책심의회의 심의를 거친 뒤 계획을 확정해 국회 소관 상임위원회에 보고하도록 하고 있다.
민주당의 개정안은 전력계획의 수립·변경 시부터 국회 상임위원회의 동의를 받도록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또 전력정책심의회(30명 이내의 위원으로 구성)의 경우 국회에서 10명 이상의 위원 추천을 의무화하는 내용도 담겼다. 사실상 전력계획을 만드는 정부의 역할을 빼앗겠다는 의미다.
관가에서는 전력계획이 정치적 쟁점 사항이 된 시기로 이명박 정부 시절인 2011년을 꼽는다. 그해 9월 15일 오후 3시쯤 늦더위에 전력 소비량이 늘면서 전력 예비력이 4000㎿ 이하로 떨어졌다. 전력 당국은 블랙아웃(대규모 정전)을 막기 위해 전국에서 지역별 순환 단전을 했다. 이 사태로 약 753만 가구가 정전을 겪었고, 약 620억원의 재산 피해가 발생했다. 사상 초유의 정전 사태에 야당은 대통령의 사과 결의안 채택, 최중경 지식경제부 장관 해임, 감사원 감사청구 등을 요구했다.
산업부는 정전 사태의 여파로 6차 전력계획부터 수요 전망을 하계와 동계로 구분하고 최대 전력 수요 전망을 12.5% 늘렸다. 하지만 야당은 “주먹구구 전력수급계획”이라고 비판하며 또다시 감사청구에 나섰다. 박근혜 정부가 출범하고 2015년 7월 7차 전력계획이 발표됐다. 정의당은 논평을 통해 산업부를 원전 마피아에 비유하며 전력계획 전면 폐기와 재수립을 요구했다.
전력계획과 관련해 여야의 대립이 극에 달한 것은 문재인 정부부터다. 문재인 정부는 탈원전 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미래 전력 수요 전망을 과소 추계했고 탈원전 정책으로 원전의 발전 비중은 24%까지 떨어졌다.
백운규 전 산업부 장관과 조현옥 전 청와대 인사수석비서관은 탈원전과 태양광 보급 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전 정권에서 선임된 공공기관장의 사퇴를 압박한 이른바 ‘블랙리스트 사건’으로 재판 받고 있다. 이들은 문재인 정부 출범 직후인 2017년 9월부터 이듬해 5월까지 산업부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등 부처 산하 공공기관장 18명에게 사직을 강요한 혐의로 기소됐다.
한전KPS의 경우 2017년 12월 직원 86명의 인사를 단행했지만, 청와대 인사수석실이 원하는 기관장 임명 전에 인사가 단행됐다며 사흘 만에 취소됐다. 당시 청와대는 지시를 거역했다며 특별감찰반을 보내 조사하겠다며 압박하기도 했다.
백 전 장관은 2021년 6월 월성 1호기 조기 폐쇄 과정에서 부당한 압력을 행사한 혐의(직권남용 권리행사 방해·업무방해)로도 재판 받고 있다. 2018년 당시 원전 담당 과장이 ‘월성 1호기는 조기 폐쇄하되, 다만 원자력안전위원회의 원전 영구정지 허가가 나올 것으로 예상되는 2020년까지 약 2년간 한시 가동’ 방안을 보고하자, 백 전 장관은 “너 죽을래? 즉시 중단으로 보고서를 다시 쓰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당시 문재인 대통령이 “영구 가동 중단은 언제 결정한 계획인가”라고 댓글을 달았는데, 검찰은 이를 계기로 월성 원전 1호기 조기 폐쇄가 진행됐다고 보고 있다. 윤석열 정부가 들어서면서 검찰 수사가 시작됐고 산업부는 여러 차례 압수수색 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세종시의 한 공무원은 “산업부의 압수수색과 검찰 수사는 공무원 사회에 큰 충격을 줬고 여야의 쟁점 사안에 대해서는 특별법 없이는 사실상 일을 하기 어려운 구조가 됐다” “에너지 안보는 정권이 바뀐다고 달라지는 게 없다. 과거 전력, 원전 분야는 공무원 중에서도 일 잘하는 사람들이 갔던 곳인데, 지금은 점차 꺼리는 자리로 바뀌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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