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정상 우정의 대가 [뉴스룸에서]
조기원 | 국제부장
퇴임을 한달 정도 앞둔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주말 동안 한국을 방문해 윤석열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했다. 2021년 10월4일 총리 취임 뒤 12번째 한-일 정상회담을 했다.
3년가량의 총리 임기를 마무리하는 외교 일정으로 한국 방문을 택할 만큼 기시다 총리의 한-일 관계에 대한 관심은 각별한 듯 보인다. 그는 지난달 14일 차기 자민당 총재 선거 출마를 포기해 사실상 퇴임 의사를 밝힌 기자회견에서 “일-한 관계의 개선과 글로벌 사우스와의 관계 강화”를 자신의 “커다란 성과”로 자부했다.
기시다 총리의 자부에는 이유가 있다. 경제 중심 노선으로 유명한 파벌인 ‘고치카이’(기시다파)의 수장이었던 그는 취임 직후 “새로운 자본주의”를 외치며 자신만의 색깔을 내보일 듯했으나, 임기 동안 눈에 띄는 경제 성과는 없었다.
하지만 외교 안보 분야에서는 일본 헌정사상 최장기 총리 재임 기록을 세운 아베 신조 전 총리도 이루지 못한 일들을 해냈다. 대표적인 일이 한-일 외교 관계에서 한국의 일방적 양보를 받아낸 것이다. 윤석열 정부는 지난해 3월6일 양국 간 핵심 쟁점인 대법원 강제동원 피해 배상 판결 문제와 관련해, 일본 가해 기업 대신 한국의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 배상금을 지급하는 ‘제3자 변제안’을 발표했다. 일본 정부는 대법원 강제동원 피해 배상 판결이 1965년 한-일 기본조약 및 청구권 협정 위반이며 일본 기업 배상금 지급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고 주장해왔는데, 결국 일본 기업이 배상금을 지급하지 않는 안을 윤 정부가 들고 온 것이다. 윤 정부는 일본의 “성의 있는 호응”을 기대한다고 하였으나, 호응은 끝내 없었다. 열흘 뒤인 3월16일 도쿄에서 열린 한-일 정상회담에 맞춰 한·일 기업에서 재원을 모아 인재 교류와 산업협력 강화 등을 해보자는 미래기금 조성이 급조돼 발표됐으나, 이 기금은 강제동원 피해와 아무 관계가 없다. 당시 정상회담 뒤 기시다 총리는 “1998년 일-한 공동선언을 포함한 역사 인식에 관한 역대 내각의 입장을 전체적으로 계승한다”고 말했으나, 강제동원 피해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은 하지 않았다.
석달 뒤인 6월에 일본은 반도체 소재 등에 대한 대한국 수출 규제를 모두 해제했으나 이 역시 호응은 아니다. 수출 규제는 원래 일본 정부가 공식적으로 강제동원 판결과 관계없다고 주장해온 것이다.
윤 정부가 한-일 관계 개선과 한·미·일 안보협력을 우선시하며 과거사를 거의 묻지 않자 기시다 정부는 이를 새 표준으로 굳히는 행보를 했다. 기시다 총리는 제3자 변제안 발표 1년1개월 뒤인 지난 4월 미국을 방문해 상·하원 합동 회의 연설을 했는데, 이 자리에서 과거 침략 전쟁과 식민지배에 대한 반성은커녕 관련 내용을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역사 수정주의자’로 비판받던 아베 전 총리도 2015년 4월 미국 상·하원 합동 회의 연설에서 “전후 일본은 지난 대전(2차 세계대전)에 대한 깊은 반성을 마음에 담고 우리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우리 행동이 아시아 여러 나라 국민에게 고통을 안긴 사실로부터 눈을 돌려서는 안 된다”고 언급했다. 아베 당시 총리는 ‘위안부’ 피해 문제 등으로 인한 비판을 받고 있는 중이라 역사 문제에 대한 언급을 피할 수 없었다.
하지만 기시다 총리는 윤 정부가 일본의 반성을 촉구하지 않으면서 그런 부담에서 벗어났다. 기시다 총리 미국 방문 전 일본 지지통신은 외무성 간부가 미국 의회 연설문과 관련해 “(과거사 문제가) 일단락돼 있다”고 말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기시다 총리는 사실상 퇴임 의사를 밝힌 지난달 14일 기자회견에서 “내년은 일-한 국교 정상화 60년이 되는 해다. 일-한 관계 정상화를 한층 확실하게 해야 한다”고도 강조했다. 한국이 ‘일본의 호응과 마음’에 기대며 요구를 하지 않는 사이 일본은 이를 “일-한 관계의 정상화”로 굳히고 있다.
기시다 총리 퇴임 뒤 누가 일본의 새로운 총리가 되어도 이는 바뀌지 않는 일본 정부의 태도가 될 것이다. 한국에서 새로운 대통령이 탄생해 일본 정부가 생각하는 “일-한 관계의 정상화”를 비판하면 일본은 이를 ‘한국이 골대를 옮긴다’고 집중 공격할 것이다. 한-일 정상 우정의 대가는 크다.
garde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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