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욱의 과학 오디세이] [64]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 커다란 나무가 쓰러졌다. 쿵 소리가 나겠는가, 안 나겠는가?” 최근에 인기를 끌었던 한 OTT 드라마가 시작하면서 던지는 질문이다. 물론 드라마에서 이 질문은 상징적이다. 꺼림칙한 상황을 내가 보지 못했다고 ‘아무 일 없었겠지!’ 하면서 넘겨서는 안 된다는 얘기며, 따라서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드라마에 등장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지금 답해보자. 소리가 나겠는가, 안 나겠는가. 필자가 가르치는 대학생들에게 물어보면 대략 7:3 정도 나온다. 소리가 난다는 쪽이 7, 안 난다는 쪽이 3.
서양 과학사와 철학사에서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시대에 따라 달라졌다. 고대와 중세를 지배하던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서는 소리가 난다는 것이 답이었다. 물체의 색깔, 냄새, 소리, 맛 등은 그 물체가 가진 속성이었고, 물체와 함께 존재하는 것이었다. 예컨대, 사과의 붉은색은 사과 껍질에 실제로 존재한다. 깜깜한 밤에는 붉은색을 볼 수 없는데, 그 이유는 빛이 없기 때문이다. 소리 역시 물체의 속성이기 때문에,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 나무가 쓰러져도 쿵 소리가 난다. 사람이 없기 때문에 들을 수 없을 뿐이다.
반면에 17세기 과학혁명 시기에 등장해서 아리스토텔레스 자연철학을 비판하고 대체한 근대 과학은 물체의 성질을 근본적인 일차 성질과 부수적인 이차 성질로 나누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원자 같은 입자의 크기, 모양, 배열, 숫자 등은 일차 성질이다. 이것이 인간의 감각을 자극해서 일으키는 색깔, 냄새, 맛, 소리, 촉감 등은 이차 성질이다. 이차 성질은 실제로 존재하지는 않으면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빛이 없으면 색깔이 없고, 인간이 없어도 색깔이 없다.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 나무가 쓰러지면? 근대 과학의 세계관에 따르면 쿵 소리가 나지 않는다. 숲에는 공기의 진동만이 있을 뿐이다. 우연히 그 숲에 사람이 있다면 그는 그 진동을 쿵 소리로 들을 수 있다.
설득 안 된 내 학생들은 나무가 쓰러지는 숲에 몰래 녹음기를 놓아 녹음하면 쿵 소리가 났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고 반론한다. 다시 질문해 보자.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 이 녹음기를 틀었을 때 쿵 소리가 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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