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정아의 아트 스토리] [548] 점잖은 화가들

우정아 포스텍 교수·서양미술사 2024. 9. 9. 2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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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리스 판 틸보르, 우아한 실내, 1660년대, 캔버스에 유채, 139 x 210 cm, 개인 소장.

17세기, 오늘날 벨기에 한 저택의 실내 광경이다. 말끔하게 차려입은 신사 열두명이 모자를 갖춰 쓴 채 한 방에 모여 섰다. 당시 브뤼셀에서 일반인들의 생활상을 생생하게 그린 풍속화와 부유한 시민들의 집단 초상화 전문가로 이름을 날리던 화가 길리스 판 틸보르(Gillis van Tilborgh· 1625~1678년경)의 매우 전형적인 작품이다.

왼쪽의 넷은 테이블에 놓인 굴을 까먹으며 대화를 나누고, 오른쪽의 둘은 가까이 내려놓은 그림들을 찬찬히 바라보며 감상을 주고받는다.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몰린 건 역시 가운데 테이블 위에서 벌어지는 주사위 놀이다. 이처럼 세부는 치밀하고 설정 또한 자연스럽지만, 방 가운데 한 줄로 나란히 서서 모두 정면을 향해 얼굴을 돌리고 어떻게든 멋스러운 포즈를 취하며 뻣뻣하게 앉거나 선 인물들의 모습은 어색하기 짝이 없다.

사실 초상화로서 이 그림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인물들의 면면을 적절히 미화해서 관중에게 확실히 각인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이 극적인 이야기의 주인공이 돼서 대단한 행동을 하거나 그림 전체가 조화로울 필요는 없고, 다만 이들의 생김새와 모인 장소의 품격이 잘 드러나면 그걸로 충분하다. 그러니 인물들만큼 눈길을 강하게 잡아 끄는 게 고급스러운 벽면을 채운 그림들이다. 점잖은 이 남성들의 정체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1779년 판매 기록에는 ‘화가들’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성모자상을 비롯한 종교화뿐 아니라, 활기찬 풍속화, 주위 풍광을 담은 풍경화, 진귀하고 화려한 물건이 가득한 정물화 등 당대 최신 유행 그림들을 모두 갖춘 이들은 작품을 구매할 고객들에게 화가들 또한 얼마나 점잖고 교양 있는 이들인지를 강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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