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자민당 ‘비자금 스캔들’ 쇄신 바람 기대…돌고 돌아 ‘보수화’ 가능성도[사이월드]
후보 10명 넘어 ‘역대 최다’ 난립
반파벌·40대·여성, 핵심 키워드
이시바 선두·고이즈미 추격 구도
차기 총리 선거나 다름없는 일본 집권 자민당 총재 선거가 오는 27일 치러진다. 이번 선거는 기시다 후미오 정권이 위기에 처한 배경인 ‘비자금 스캔들’의 후폭풍 아래 열려 역대 선거와 다른 독특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투·개표가 약 3주 앞으로 다가온 9일 이번 자민당 총재 선거 특성과 유력 후보군, 향후 전망을 살펴봤다.
■ ‘역대급’ 후보 난립
현지 언론은 이례적 후보 난립에 주목하고 있다. 자민당 내에선 이번 출마자가 11명에 달해 역대 최다 기록을 경신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민영방송 뉴스네트워크 JNN은 총 12명이 나설 것으로 예상하기도 했다. 공식적으로 출마 선언한 사람은 이날까지 7명이다. 직전까지 총재 선거 최대 출마자 수는 5명이었다.
이 같은 후보 난립은 지난해 비자금 스캔들 이후 당내 파벌 해체에 따른 여파로 분석된다. 기존엔 아베파, 모테기파, 기시다파 등 6개 파벌 내부에서 출마 후보를 두고 물밑 ‘교통정리’가 이뤄졌으나, 스캔들 이후 아소파를 제외한 모든 파벌이 해산을 선언함에 따라 이런 모델이 붕괴했다.
기존 기시다파에서는 하야시 요시마사 관방장관(63)이 지난 3일 출마를 선언했고, 같은 파 소속 가미카와 요코 외무상(71)이 출마를 적극 검토 중이다. 모테기파에서는 모테기 도시미쓰 간사장(68)이 4일 출마를 발표했고, 가토 가쓰노부 전 관방장관(68)은 출마 의욕을 드러내왔다. 존속 중인 아소파의 고노 다로 디지털상(61), 옛 니카이파인 고바야시 다카유키 전 경제안보담당상(49) 등 복수 정치인이 출정을 공식화했다.
현직 기시다 총리가 지난달 14일 불출마를 선언한 것도 후보 난립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분석된다. 총리가 재선을 목표하는 경우 현 정권 각료나 당 지도부 인사는 출마를 삼가는 것이 관례인데, 기시다 총리의 불출마로 이 같은 고민거리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다만 당내에선 결국 10명 안쪽으로 후보군이 추려질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이는 당 소속 국회의원 20명 이상의 추천이 있어야 총재 선거 출마가 가능하다는 규정 때문이다. 복수 여론조사에서 총재 선호도 3위를 차지한 다카이치 사나에 경제안보담당상(63)도 추천인 확보에 어려움을 겪은 것으로 알려졌다.
■ ‘포스트 기시다’ 쇄신 경쟁
총재 선거 핵심 키워드로는 반파벌, 40대, 여성이 거론된다. 기시다 총리가 빠지면서 ‘정권 비판 대 정권 옹호’ 같은 단순한 구도 너머 쇄신 메시지로 백가쟁명하는 상황이 됐다. 비자금 스캔들 ‘구태’로 당이 국민에게 외면받았다는 평가를 일소하려면 특히 개혁을 상징하는 인물이 필요하단 지적이 두드러졌다. 젊은 정치인에게 당 안팎 관심이 쏠린 이유다.
40대 고바야시 전 경제안보담당상은 지난달 가장 먼저 선거전에 뛰어들며 “모든 당원과 국민에게 새로운 자민당으로 거듭날 것을 약속한다”고 했다. 최연소 후보인 고이즈미 신지로 전 환경상(43)도 지난 6일 출사표를 내며 “개혁을 압도적으로 가속할 수 있는 리더”라고 자칭했다.
이 중 고이즈미 전 환경상은 반파벌 메시지로도 주목받고 있다. 비자금 스캔들 이후 지지율 급락이 기시다 총리의 불출마 배경으로 꼽히는 만큼, 일본 정치권 안팎에서 파벌과의 거리감은 쇄신의 한 척도로 여겨진다. 고이즈미 전 환경상은 특정 파벌에 속한 적이 없다. ‘파벌 정치의 희생자’로 불리는 이시바 시게루 전 당 간사장(67)도 무파벌 혁신 정치인 이미지로 여론조사에서 꾸준히 강세를 보여왔다.
일본 사상 처음으로 여성 총리가 배출될지도 정가의 관심사다. 다카이치 경제안보담당상, 노다 세이코 전 총무상(63), 가미카와 외무상 등이 유력 여성 후보다. 특히 다카이치 경제안보담당상은 일부 당내 여론조사에서 고이즈미 전 환경상과 호각으로 나타나 “태풍의 눈이 될 수도 있다”는 평을 받는다고 후지티비네트워크는 전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A급 전범들이 합사된 야스쿠니 신사에 자주 참배해 우익 성향으로 분류되며 ‘여자 아베’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다만 이번 자민당 총재 선거 출마를 선언하거나 검토 중인 11명 인사 중 6명은 아버지 등 정치 기반을 물려받은 세습 정치인이어서 누가 됐든 혁신성은 떨어지는 것 아니냐는 냉소적 반응도 나온다.
■ 고이즈미 vs 이시바
현재까지 판세는 이시바 전 간사장이 복수의 여론조사에서 1위를 기록 중인 가운데 고이즈미 전 환경상이 ‘다크호스’로 부상해 바짝 뒤쫓는 모양새다. 이날 JNN이 공개한 여론조사 결과에선 고이즈미 전 환경상이 지지율 1위(28.5%)로 나타나는 등 역전 분위기도 감지됐다.
고이즈미 전 환경상은 2001~2006년 자민당을 이끈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의 차남이다. 미국 컬럼비아대에서 정치학 석사를 취득한 뒤 2007년 귀국해 부친의 비서로 정계에 첫발을 디뎠다. 이듬해 정계를 은퇴한 아버지의 과거 지역구 가나가와현 11구에 2009년 출마해 당선됐다. 지금은 5선 의원이다.
각료 경험이 아베 신조 전 총리 시절 약 2년 동안 맡은 환경상이 전부여서 총리직을 수행하기엔 시기상조라는 평도 나온다. 2019년 “기후변화 같은 커다란 문제는 즐겁고(fun) 멋지게(cool), 섹시하게(sexy) 대응해야 한다”고 발언했다가 ‘펀쿨섹좌’라는 별명을 얻는 등 엉뚱한 표현으로 구설수에 오른 일도 많다.
이시바 전 간사장은 총재 선거에 다섯번째 도전한다. 2008년부터 2020년까지 총 네 차례 나섰지만 번번이 고배를 마셨다. 당 총재 선호도 여론조사에선 줄곧 1~2위를 차지할 만큼 지명도가 높지만 당내 기반이 약한 것이 약점으로 꼽힌다.
돗토리현 출신 2세 의원인 그는 1986년 만 29세 나이로 중의원(하원) 선거에서 당시 최연소 기록을 세우며 화려하게 정치 이력을 시작했다. 고이즈미 내각에서 방위청 장관(한국의 차관급)으로 처음 입각했고, 후쿠다 내각에서 다시 방위성 대신(한국 장관급)을 맡아 외교안보 분야에서 전문성을 키웠다.
■ 결선투표 치를까
정치권과 현지 언론은 두 사람이 결선투표까지 치를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후보자가 많아 복수의 총재 선호도 조사에서 각기 30% 미만 지지율을 보이고 있어서다. 규정상 총재는 국회의원 및 당원, 당우(자민당 후원 정치단체 회원) 투표 합계(현재 기준 총 734표)에서 단독 과반수를 차지한 후보가 선출되나, 단독 과반 후보가 없는 경우엔 상위 2명이 2차 투표를 벌여 다수 투표자가 당선된다.
결선투표는 국회의원 표(현재 367표)에 광역자치단체인 47개 도도부현마다 1개씩 주어지는 지방 표를 합산하는 방식으로, 당내 지지도가 약한 이시바 전 간사장에 불리하다는 전망이 우세하다. 다만 이번 선거는 후보자 수가 역대 최다인 만큼 국회의원 표 영향력은 예전보다 줄고 당원·당우 표 무게감이 커졌다는 분석도 있어 1차 투표 향배를 가늠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나온다.
경쟁 전망이 불투명해짐에 따라 후보자들이 보수 표심에 민감해질 수 있다는 역설적 관측도 나온다. 고노 다로 디지털상이 최근 원전 시찰에 나선 것이 한 예다. 그는 ‘탈원전’ 소신 등 당론과 반대되는 입장을 밝혀 당내 이단아로 분류돼왔다.
마이니치는 이날 사설에서 “(이번 선거는) 자민당이 잃어버린 국민 신뢰를 되찾을 수 있을지 좌우할 분수령”이라며 “그럼에도 ‘정치와 돈’ 문제에 진지하게 임할 각오가 느껴지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조문희 기자 moon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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