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년 만에 밝혀진 ‘부랑인 수용시설’ 실체…“친권포기 강요·시신 교부도”

배지현 2024. 9. 9. 2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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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랑인 수용시설이라는 이름 아래 감금·폭행·강제노역 등이 이뤄졌던 이른바 ‘제2의 형제복지원’들의 실상이 2기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진화위) 조사를 통해 37년 만에 드러났습니다.

진화위는 오늘(9일) 오전 서울 중구 진실화해위 대회의실에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서울시립갱생원 등 성인 부랑인 수용시설 4곳에서 중대한 인권침해가 일어난 사실을 확인했다고 밝혔습니다.

이는 전국 부랑인 수용시설에서 벌어진 인권침해 실상을 종합적으로 규명한 첫 사례입니다.

■ 서울시립갱생원 등 4개 시설서 ‘인권 침해’…“13명 진실규명 결정”

진화위는 지난 6일 열린 제86차 위원회에서 서울시립갱생원·대구시립희망원·충남 천성원·경기 성혜원에서 생활했던 수용자 윤 모 씨 등 13명에 대해 진실규명 결정을 내렸다고 밝혔습니다.

이들 4개 시설은 정부 시책에 의한 성인 부랑인 수용시설로 1975년 내무부훈령 제410호, 1981년 구걸행위자보호대책, 1987년 보건사회부훈령 제523호 등 부산 형제복지원과 동일한 정책을 근거로 운영됐습니다.

수용자 규모는 서울시립갱생원이 1천900명, 대구시립희망원 1천400명, 충남 천성원 1천200명, 경기 성혜원 520명으로 추정됩니다. 모두 합치면 수용자 3천100여명으로 알려진 형제복지원의 규모를 넘습니다.

진실화해위 조사 결과 수용자들은 경찰·공무원 합동 단속반이 ‘사회정화’ 명목으로 행한 불법적 단속에 의해 연행된 뒤 민간 법인에서 위탁 운영하는 부랑자 수용시설에 강제로 입소했습니다.

휴일 없이 매일 무급노동을 해야 했고, 다른 수용시설 건축 작업에도 동원됐습니다.

시설 규칙을 위반했다며 독방에 감금되거나 시설 간부로부터 구타를 당해 사망에 이르는 등 인권침해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이날 기자간담회에 참석한 진실규명 대상자 60대 이영철(가명)씨는 시설 생활 당시 오전 7시부터 오후 7시까지 시설 건설 공사를 했다고 밝혔습니다.

이 씨는 “산비탈 밑에서 일하다 흙이 무너져 내려 사람들이 매장당해 죽는 일도 있었다”며 “입소자들이 죽으면 공동묘지에 매장했는데 여름에 비가 많이 오면 시체가 드러나 개들이 뼈를 물고 돌아다니기도 했다”고 증언했습니다.

서울시립갱생원에서는 1980년 수용자 추정 인원 1천명의 25%가 넘는 262명이 사망한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시설에서 출산할 경우 친권 포기를 강요해 당일이나 이튿날 신생아를 입양알선기관으로 보냈고, 시설에서 사망한 수용자 시체를 해부실습용 시신으로 교부한 사례도 있었습니다.

천성원 산하 성지원에서 인근 의대에 보내진 시체 교부 수는 1982년부터 1992년까지 10년간 117구에 달했는데, 이는 해당 의대가 인수한 전체 시체 수인 161구의 70%가 넘습니다.

■ 시설에서 또 다른 시설로…‘회전문 입소’ 최초 확인

진화위는 이번 조사를 통해 수용자들이 부산 형제복지원을 비롯한 다른 시설로 강제 전원되는 등 ‘회전문 입소’가 이뤄진 실태를 최초로 확인했다고 밝혔습니다.

진실규명 대상자와 참고인 등의 증언에 따르면 전원 조치는 타 시설 노동력 동원 또는 인원 충원, 규칙 위반자 처벌 등을 위한 목적으로 이뤄진 거로 추정됩니다.

이영철 씨(가명)는 1973년 가을 15살 나이에 대구시립희망원에 입소해 서울시립갱생원, 충남 천성원 등에 23년간 강제수용됐습니다.

그는 “대구역 대합실에 앉아있는데 대구시청 직원 2명이 따라오라고 해 갔더니 탑차에 실어 대구시립희망원에 입소시켰다. 1998년에야 시설에서 나오게 됐다. 70만원을 주며 조치원역에 내려줬다”고 증언했습니다.

1987년 당시 인권침해 실상이 폭로되면서 형제복지원은 검찰 수사를 받았지만, 이들 4개 시설은 당시 공적 조사 없이 부랑인 수용 업무를 지속했습니다.

충남 천성원 산하 성지원의 경우 1987년 신민당이 현장 방문조사를 시도했지만, 시설 측이 입구를 막고 국회의원과 기자를 폭행하면서 조사가 좌절됐습니다.

이후 성지원 수용자 221명이 집단 탈출해 대전 시내에서 가두행진을 벌였으나 모두 경찰에 검거돼 재수용됐고, 이 중 2명은 서울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인권침해 실태를 폭로했지만 이튿날 경찰에 붙잡혀 다시 시설에 수용되기도 했습니다.

이들 시설은 이름이나 형태, 운영 법인 등을 바꿔가며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습니다.

진화위는 피해자에 대한 공식 사과와 실질적 피해회복 조치, 시설 수용 인권침해 재발방지책 마련 등을 국가에 권고했습니다.

또 형제복지원을 비롯한 다른 집단수용시설 피해를 포괄하는 특별법을 제정해, 피해자들이 개별적 구제신청 없이도 적절한 보상과 재활 서비스 등을 받을 수 있도록 하라고도 권고했습니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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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지현 기자 (veteran@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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