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점] “활력 떨어진 벤처 생태계, 재점화 위해 M&A·IPO 활성화해야”
바이오·소부장 등 혁신 기업조차 자금난으로 애로 심화
韓 유니콘 글로벌 비중 5년간 1%p 줄어 1.2% 그쳐
“R&D 지원·스케일업·규제 혁파로 역동적 생태계 구축”
# 과거 국내 벤처캐피털(VC)에서 100억 원 넘는 투자를 받은 첨단 고부가가치 소재 벤처기업 A사는 수년째 국내 투자사들이나 대·중견 소재 기업의 투자를 받지 못하자 해외로 눈을 돌렸다. 외국 기업과의 전략적 제휴를 통해 자금을 유치하고 수출도 추진하기 위해서다. 그 결과 전기차 배터리, 에너지저장장치(ESS)의 열폭주 지연 필름 기술에 주목한 중국 소재사로부터 지난달 20억 원가량의 투자를 유치했다. 2013년 창업한 A사는 반도체·스마트폰·전장 부품의 전자파 차폐 및 방열 소재, 반도체 패키지 테스트 부품용 도전성 입자 기술도 갖고 있다. 현재 일본 소재 회사와 투자 유치 협상이 마무리 단계에 있고 독일 소재 회사 및 중국 정보기술(IT) 업체와의 협상 또한 순항 중이다. A사의 사례는 역설적으로 활력이 떨어진 국내 벤처·스타트업 생태계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그만큼 현장에서는 투자 시장의 경색이 풀리지 않고 있고 인수합병(M&A)이 여의치 않으며 기업공개(IPO) 시장의 문도 매우 좁다. 올해 연구개발(R&D) 예산이 대폭 삭감된 것 역시 벤처·스타트업의 활력 저하로 이어졌다는 지적이다.
A사의 J 대표는 “딥테크 기업은 장기 지원이 필요한데 창업 7년을 넘기면서 정부의 R&D 과제를 맡기가 어려워졌다”며 “재무제표가 좋지 않으면 과제 선정에서 제외되는 경우도 많다”고 말했다. 이어 “투자 시장이 회복세라고 말하지만 여전히 혹한기여서 보수적인 VC의 투자를 받기가 쉽지 않다”며 “국내 대·중견 소재 회사의 경우 기술만 빼가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고 덧붙였다. 그는 “딥테크 중 창업 3~7년 차에 겪는 ‘데스밸리(죽음의 계곡)’를 넘겼으나 이후 정부의 마중물 부족으로 우수 기술이 사장되는 곳도 많으므로 지속적인 관심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바이오 등 위기 상황에 M&A도 잘 안 돼
정부가 반도체에 이어 주요 전략산업으로 육성하려는 바이오 시장의 경우 2022년부터 투자 시장이 아예 얼어붙었다. 한국바이오협회가 620여 회원사를 상대로 지난해 10월 개설한 중고 바이오 장비 직거래 마켓에는 의약품 보관용 냉동고, 세포배양기 등 60여 건의 매물이 나와 있다. 적지 않은 바이오사가 생사의 기로에 있다는 방증이다. 의생명과학 박사인 채예진 위드윈인베스트먼트 이사는 “바이오사들 중 인력 감축은 물론 임상 중단, 연구실 폐쇄 등 ‘무늬만 바이오사’도 늘고 있어 국내 1000여 개 바이오 회사 중 20~30%는 휴면 기업으로 추정된다”며 “M&A 시장에 많은 매물이 헐값에 나오고 있으나 거래가 잘 이뤄지지 않는다”고 전했다. 한국M&A거래소에 공개된 상장 바이오·의료·헬스사의 경우 올 상반기 M&A 추진 건수가 25건으로 전년 동기보다 30% 늘었으나 해외에 비해서는 활발하지 않은 편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2021년 기준으로 한국의 VC 투자 회수 비중에서 M&A는 2%에 불과해 미국과 영국(각 37%)보다 크게 부족하다고 지적한 바 있다.
윤석열 정부가 12대 국가전략기술 중 인공지능(AI)·반도체, 퀀텀(양자)과 함께 3대 미래 전략기술로 꼽고 있는 첨단바이오 분야 역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의 ‘게임체인저’인 메신저리보핵산(mRNA) 백신을 효과적으로 전달한 지질 나노 입자 분야에서 독보적 기술력을 갖고 있는 L사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다. 미국 국립보건원(NIH) 등에서 자금을 받아 차세대 항바이러스 치료제 개발 추진과 함께 효과적인 암 진단, 신약 개발, 유전자 전달 플랫폼 기술로 두각을 나타내고 있지만 2년 넘게 바이오 투자 시장이 경색된 데다 정부 지원도 부족하기 때문이다.
L사의 A 대표는 “4년 전 해외 유명 대학 교수와 함께 창업한 뒤 200억여 원의 투자 유치 자금을 연구비로 소진해 고충이 적지 않다”며 “다만 코로나19 재유행으로 인해 진단키트가 잘 나가고 우여곡절 끝에 유명 제약사와 몇 개 물질의 기술 이전을 협의 중이어서 생존 가능성이 커졌다”고 자신했다. 비록 자신의 회사는 회생 가능성이 커졌으나 혁신 생태계가 작동하지 않으면 블록버스터 가능성이 있는 신약 개발의 씨앗도 사라진다는 게 그의 호소다. 물론 삼성·셀트리온이 바이오시밀러에서 큰 성과를 내고 알테오젠·리가켐바이오가 항체·약물 접합체(ADC) 분야에서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다. 유한양행 등은 폐암 치료제의 조 단위 기술수출 계약을 맺었다. 그러나 여전히 정부가 강조하는 글로벌 바이오헬스 6대 강국 도약과는 괴리가 크다.
혁신 창업·스케일업 생태계 유기적 작동 필요
한국지식재산연구원에 따르면 벤처·스타트업의 R&D 경쟁력이 떨어지면서 올 상반기 중소기업의 특허 출원은 지난해 상반기보다 3.2% 줄어든 2만 7404개에 머물렀다. 글로벌 시장조사 업체인 CB인사이츠에 따르면 한국의 유니콘(기업가치 1조 원이 넘는 비상장 스타트업)은 14곳으로 지난 5년 동안 4개가 늘었으나 세계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2%로 오히려 1%포인트 하락했다. 그나마 쇼핑 플랫폼과 게임 등이 주를 이룬다. 자연스레 경제에서 대기업 의존도가 갈수록 심화하는 양상이다. 조남준 난양공대 석학교수는 “추락하는 잠재성장률을 높이고 미래 성장 동력을 창출하려면 혁신 DNA로 무장한 생태계를 키워야 한다”고 역설했다.
대학과 정부 출연 연구소 등에서 딥테크 기업 창업이 늘고 있으나 일부 업종에 편중돼 있고 사업화 등 유기적 지원 생태계도 부족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딥테크 벤처·스타트업이 올 상반기 1조 2000억 원의 투자를 유치해 지난해 동기보다 80% 증가했다고 최근 중소벤처기업부가 밝혔으나 AI·클라우드·친환경·우주항공 등에 집중됐다. 연간 수백개의 스타트업이 정부로부터 5억 원까지 지원받는 팁스(TIPS·민간투자 주도형 기술 창업 지원) 프로그램의 수혜를 보고 있으나 이후 데스밸리를 넘지 못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물론 정부에서 스케일업 팁스와 글로벌 팁스 내놓은 것은 긍정적이지만 일정부분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다. 최근 증가세인 교수 창업의 경우 R&D 지원금 감소분을 팁스를 통해 확보하려는 경향도 엿보인다.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의 한 민간위원은 “정부가 12대 국가전략기술을 강조하며 딥테크 창업이 늘고 있다”며 “하지만 교수들은 지분을 대거 갖고 경영까지 하려고 하는데 기업에 올인하기 힘든 현실이라 사업화에 애로가 많다”고 지적했다.
탄소나노튜브(CNT) 소재와 차세대 X레이 기술로 눈길을 끄는 김세훈 어썸레이 대표는 “세 번째 창업 6년 차인데 처음부터 국산화가 아닌 퍼스트무버 기술 개발을 위해 R&D에 몰두해 이제 시장에서 인정받는 단계”라며 “벤처·스타트업에 대한 R&D 지원과 규제 혁파 등으로 역동적 생태계를 만들어야 한다”고 힘줘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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