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사육장’에서 정신질환자로 분류돼 ’빨간약’을 먹었다”

고경태 기자 2024. 9. 9. 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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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사육장에 온 것을 환영한다."

1992년 대구시립희망원에 입소한 고아무개씨는 기존 입소자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다.

대구시립희망원 1985년 퇴소자 중 입소 당시 정신과적 질환이 있다고 기재된 사례 6건에 대해 진실화해위는 정신과 전문의 등에게 자문을 의뢰했는데, 판단이 잘못됐거나 정신과적 증상이 있었더라도 만성적인 정신분열증일 가능성은 매우 낮은 것으로 분석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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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지원 정신요양원 전원 대상자 신상기록카드 일부. 진실화해위

“인간 사육장에 온 것을 환영한다.”

1992년 대구시립희망원에 입소한 고아무개씨는 기존 입소자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다. 고씨는 ‘인간 사육장’에서 직원들 퇴근 시각 직전인 4시반께 저녁식사를 하고 약을 먹었다. 수용자들은 매일 다량을 삼켜야 했던 이 약을 ‘빨간약’이라고 불렀다. 이른 시간인데도 약을 먹으면 다 쓰러졌고, 각 방문은 외부에서 잠겼다. 이 약은 조현병 등 치료에 주로 쓰이는 항정신제제 약물 ‘클로르프로마진’으로 추정된다.

보건복지부의 전신인 보건사회부는 1985년 2분기 말 기준 부랑인시설 수용자 1만4653명 중 성인은 1만1815명이며, 이중 ‘정상’은 2957명(25%), ‘정신질환자’는 4104명(34.7%)으로 파악했다. 당시 정부는 이른바 ‘기도원’으로 불리는 무인가 사설 수용시설에서 비인간적 처우를 받는 정신질환자들의 실태가 폭로되자 적극적인 시설 수용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이런 정신질환자 감별 및 분류는 시설 수용인들을 근거 없이 정신질환자로 분류해 그 비율을 높이는 결과로 이어졌다

양지원 수용자 하○○의 정신과 진단서. 진실화해위 제공

진실·화해를위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가 지난 6일, 정신질환 분류·수용 과정에서 인권침해 사례를 확인했다고 의결한 부랑인시설은 대구시립희망원과 충남 양지원이다. 대구시립희망원은 입소 시점에 의사가 아닌 직원의 간단한 면담만으로 정신분열증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대구시립희망원 1985년 퇴소자 중 입소 당시 정신과적 질환이 있다고 기재된 사례 6건에 대해 진실화해위는 정신과 전문의 등에게 자문을 의뢰했는데, 판단이 잘못됐거나 정신과적 증상이 있었더라도 만성적인 정신분열증일 가능성은 매우 낮은 것으로 분석됐다.

1998년 민간조사단이 충남 연기군 양지원을 발문했을 때 \"단 한번도 외부와 연락한 적이 없느냐\"는 인권운동사랑방 관계자들의 질문에 대다수가 손을 들었다. 한겨레 자료사진

진실화해위는 “대구시립희망원은 높은 비율로 정신질환 진단을 함으로써 수용자들에게 정신과 약물을 일괄 투여할 수 있게 됐고, 손쉽게 수용자의 행동을 통제할 수 있는 ‘화학적 구속’의 효과를 얻었다”고 밝혔다. 1992년부터 2015년까지 대구시립희망원에 있었던 고씨는 “희망원은 선생님들이 5시에 퇴근하려고 (수용자들이) 저녁을 4시 반에 먹게 했다. 저녁을 일찍 먹이고 약을 먹게 하면(그래서 모두 잠들면 직원들이) 퇴근 시간에 맞출 수 있다”고 진술했다. 참고인 조사에 응한 대구시립희망원 직원 심아무개씨도 “대부분 원생이 간질·정신병이 있었기 때문에 약을 먹고 나면 대부분 축축 늘어져서 잠을 잤다”고 진술했다.

2016년 12월26일 오전 11시 ‘대구시립희망원 인권유린 및 비리척결 대책위원회’가 대구지방검찰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대구시립희망원 사건에 대한 검찰의 엄중한 수사를 촉구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대구시립희망원에서 수용자들에게 먹인 것으로 추정되는 클로르프로마진은 빨간색 원형으로 생긴 1세대 항정신약물이다. 다수의 정신의학과 전문의들은 “당시 부랑인수용시설에서는 항정신성 약물인 클로르프로마진과 할로페리돌, 진정제인 바륨, 아티반이 많이 쓰였다”고 전했다. 이 약들은 최근 사망사고가 잇따르고 있는 정신병원에서도 ‘급성기 환자’에게 투약한 약이다.

충남 연기군 양지원은 맞은편에 정신요양시설인 송현원을 설립하고 1987년에 수용자 121명을 전원시켰다. 당시 전원 공문에 첨부된 진단서에는 정신분열병, 기질성뇌증후군, 정신지체, 간질 등의 진단명이 부여됐지만 재원기간 정신과 진료 또는 입원치료 기록은 전혀 없었다. 부랑인을 사회로부터 즉각 격리시키기 위해 정신질환자로 낙인찍는 방식을 활용한 것 같다고 진실화해위는 분석했다.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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