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의 ‘강도 귀족’과 ‘머크레이커’ [시민편집인의 눈]
제정임 | 세명대 저널리즘대학원장
18세기 중반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은 생산성의 폭발을 낳았지만, 그 열매가 고루 나뉜 것은 아니었다. 혁신 기술을 활용한 자본가들이 엄청난 부를 쌓는 동안, 노동자들은 기계에 매달려 지치도록 일하고도 겨우 입에 풀칠할 정도의 임금을 받았다. 다론 아제모을루와 사이먼 존슨은 저서 ‘권력과 진보’에서 ‘강도 귀족’(Robber baron)으로 불린 19세기 말 미국 기업가들의 예를 들었다. 철도, 철강, 기계, 석유 등의 신기술로 기회를 잡은 이들은 정치인을 매수하고 경쟁자를 축출하며 덩치를 키웠다. 이들이 극단적인 사치로 부를 과시할 때, 노동자들은 열악한 작업장에서 쥐꼬리만 한 보수를 받으며 노예처럼 일했다. 특히 가난한 집 아이들, 말이 잘 통하지 않는 이민자들은 탄광 등 위험한 곳에서 일하다 종종 목숨을 잃었다.
아제모을루와 존슨은 이렇게 불평등이 극심했던 미국 사회가 1940~1970년대의 ‘대압착(평등화) 시대’로 나아갈 수 있었던 데는 사회운동가, 진보 정치인과 함께 머크레이커(muckraker·추문 폭로자)의 역할이 컸다고 썼다. 머크레이커는 20세기 초 시사잡지 등에서 활약한 탐사 저널리스트를 말한다. 미국 육가공업계의 끔찍한 노동조건을 폭로한 ‘정글’의 작가 업턴 싱클레어, 존 데이비슨 록펠러의 스탠더드 오일이 저지른 정경유착과 노동 탄압 등을 고발한 아이다 타벨(매클루어스 매거진)이 대표적이다. 퇴비(muck)를 갈퀴질하는 사람(raker)처럼 냄새나는 곳을 쫓아다닌다는 비하가 담겼지만, 오늘날 탐사기자들은 ‘머크레이커의 후예’를 흔쾌히 자처한다. 정곡을 찌르는 폭로가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21세기에도 기업이 수익 극대화를 위해 임금을 억누르고 취약한 노동자에게 위험을 전가하는 구조는 본질적으로 달라지지 않았다. 아리셀 화재 등 최근의 산업재해를 보면, 한국의 강도 귀족들은 ‘위험의 외주화·이주화’를 애용하는 듯하다. 노동 안전에 애쓰는 기업도 없지 않지만, 숙련된 정규직이 장비를 갖추고 수행해야 할 위험 업무를 비정규직, 하청, 파견, 현장 실습생 등에게 넘겨 버리는 회사가 너무 많다. 그래서 초짜 외주노동자가 안전 장비도 없이 일하다 사고를 당하는 일이 잦다.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산재 사고사가 가장 많이 발생하는 나라 중 하나다. 최근엔 신분이 불안정하고 언어 소통이 어려운 이주노동자의 희생이 급증하는 추세다.
한국의 많은 언론사는 광고주인 기업들이 불편해할 보도를 외면한다. 그래서 대형 사건·사고가 터지지 않는 한, 국내 언론에서 노동자의 고통과 한숨을 깊이 다루는 보도는 찾아보기 어렵다. 반면 한겨레는 노동 문제에 몸을 사리지 않는 드문 매체 중 하나다. 노동을 존중하는 보도는 한겨레의 창간 정신이기도 하고, 2009년 ‘노동OTL’ 연재 등에서 봤듯 한겨레의 경쟁력 요소이기도 하다. 한겨레는 최근에도 ‘아리셀 사고 한달에 본 이주노동자 재해 무방비 실태’ ‘급식실 조리실무 노동자의 작업 환경’ ‘폭염 산재 무방비 현장’ ‘청소노동자의 씻을 권리’ ‘쿠팡의 노동착취 의혹’ 등 다양한 보도로 주목받았다. 비정규 노동자 등이 쓰는 ‘6411의 목소리’도 다른 매체에서 보기 어려운 귀한 연재다.
일하는 사람의 목소리를 공론장에 전달하고, 문제 해결의 계기를 만드는 것은 언론이 민주주의와 경제정의에 기여하는 길의 하나다. 그런데 한겨레가 노동·산업안전 보도의 폭을 더욱 넓힌다면, 매체의 영향력과 성장성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인공지능 등 기술변화로 ‘버려질 위기’에 놓인 직장인, 육아와 업무 병행 문제로 좌절하는 비정규직, 통제만 받고 보호는 못 받는 플랫폼 노동자, 직장 내 성차별과 경력단절 위기에 분노하는 여성 등 ‘보도자료에서는 볼 수 없는’ 노동 현실을 더 깊이 파고들면 어떨까. 생생한 현장 취재와 인터뷰, 탄탄한 데이터 분석과 시각화로 현실을 보여주고 대안을 제시하면 수십만, 수백만이 공감하지 않을까. 영상, 인터랙티브 콘텐츠, 팟캐스트로 만들고 소셜미디어 전파에도 공들이면 모든 세대를 아우르는 토론이 이뤄질 수도 있을 것이다. 20세기 일부 머크레이커의 약점이었던 선정성·편파성은 빼고 ‘매우 단단한 사실’과 ‘소통 기술’로 무장한, 21세기 머크레이커의 활약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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