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혹한 고문수사에 정신질환 고통…국가배상 인정 큰 걸음

한겨레 2024. 9. 9. 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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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찾아서-박래군의 인권의 꿈] 19화 고문 없는 세상의 꿈
유가협 나와 생계 위해 컴퓨터 조립
고문 피해자 지원 사업도 본격화
인권운동사랑방 사무실 한구석 빌려
정신질환 문국진 지원 모임 발족

문국진, 고문수사 중 이상행동
경찰은 “일부러 미친 척” 폭행만
구치소 수감 중 발작해 병원행
1995년 고문후유증 국가배상 판결

김근태 “경찰서 지나면 식은땀
고문후유증 평생 가는 듯” 증언
고문 피해자 발굴·지원 의지 다져
1980년대 경찰에서 고문을 당한 뒤 후유증으로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문국진씨 상황을 보도한 복음신문(사진 왼쪽부터), ‘문국진과 함께 하는 모임’ 자료, 국가배상 소송 결과를 보도한 한겨레신문 자료. 필자 제공

유가협을 나온 뒤에 며칠은 출근할 곳이 없어서 멍했던 것 같다. 갑작스러운 변화에 적응할 시간이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나는 오래 쉬지는 못할 팔자인가 보다.

내 사정을 딱하게 생각해서인지 나의 사부님이신 김거성 목사님이 전화를 걸었다. 김거성 목사는 당시에 충무로에 작은 회사를 만들어서 386 컴퓨터를 조립해서 판매하고 있었다.

“박래군씨, 요즘 유가협 나와서 뭐해요? 나하고 컴퓨터 사업 같이 해요.”

컴퓨터는 알지도 못해서 망설이는데, 걱정할 것 없다고 용기를 주었다.

“본격적인 일을 하는 상황이면 그때는 언제건 그만둬도 되고요.”

충무로 회사에 출근했다. 생계도 막막한데 월 70만원이나 준다고도 하셨으니, 이게 웬 떡이냐 하는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그때 유가협에서 받던 월 활동비가 15만원이었으니 몇배나 더 많은 월급을 준다니, 이리 고마울 데가 없었다.

386 컴퓨터 조립기사

386 컴퓨터의 탄생은 사변이었다. 정사각형의 5.5인치 플로피 디스켓을 ‘a: 드라이브’에 넣어주어야 부팅되던 286 컴퓨터와는 달리 386 컴퓨터는 전원을 넣으면 자동으로 부팅되고, 프로그램 실행이 되는 것이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김거성 사장의 지시대로 용산 전자상가를 돌아다니면서 컴퓨터 조립에 필요한 부품들을 사 오는 일, 컴퓨터를 조립하여 주문한 고객 집을 찾아가 설치하는 일을 주로 했다. 케이스 안에 메인 보드를 앉히고, 전원 박스와 하드를 장착하고, 램을 꽂고, 몇개의 선들을 연결한 뒤에 전원을 넣으면 끝이었다. 거기에 운영 프로그램(OS)을 설치하고, ‘ᄒᆞᆫ글’을 비롯한 몇가지 프로그램을 주문대로 심는 일은 사장님이 주로 했다.

처음엔 뭐가 뭔지 몰라서 헤매었지만, 몇번 해보니 할 만한 일처럼 생각되었다. 용산 전자상가에서 부품들을 사 올 때는 주로 회사 자동차를 이용했지만, 고객 집이나 사무실에 컴퓨터를 설치하러 갈 때는 전철이나 버스를 타고 다녔다. 십자드라이버와 몇개의 부품들을 예비로 넣어서 갖고 다니고 설치할 때는 나 스스로 컴퓨터 기사가 된 듯한 착각에도 빠졌다.

처음에는 컴퓨터 회사가 잘 되는 것 같았다. 당시 386 컴퓨터가 보급되던 시기였으니 주문도 제법 들어왔다. 하지만 회사는 너무 영세했다. 사장님과 나와 또 한명의 직원, 겨우 3명으로 유지되는 영세 사업장이었다. 사장님이신 김거성 목사는 교회 목회와 당시 새로운 피시(PC)통신망이었던 하이텔, 천리안 등을 통한 커뮤니케이션 활동에 관심이 많았다. 나는 나대로 당시 시작했던 고문 관련한 사업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용산 전자상가 가는 일도 컴퓨터를 설치하는 일도 줄어만 갔다.

유가협 시절 막판에 문국진 선배와 관련한 일을 시작으로 고문 피해자를 지원하는 사업을 구상하고 있었다. 문국진 선배의 부인인 윤연옥씨와 주로 의논을 했고, 문국진의 동기들인 연세대 79학번들과 일을 도모하고 있다가 유가협을 나오게 된 것이다. 유가협을 그만두자마자 고문 피해자 모임인 ‘문국진과 함께 하는 모임(이하 모임)’의 발족을 서둘렀다.

당시 용산역 건너편 성매매집결지 바로 앞에 있던 기원빌딩 5층에 인권운동사랑방 사무실이 있었다. 인권운동사랑방은 1993년에 비전향 장기수로 출소한 서준식씨가 시작한 인권단체였다.

“고문 피해자 모임을 하려고 하는데, 책상 하나 놓을 데가 없어요.”

서준식씨는 나의 사정을 들어보고 흔쾌히 내 제안을 받아주었다. 그래서 인권운동사랑방에 책상 하나 얻고, 거기에 전화기를 하나 설치했다.

문국진과 함께 하는 모임 발족 자료집. 필자 제공

고문 후유증 증언한 김근태

1993년 10월13일, 명동 향린교회에서 ‘문국진과 함께 하는 모임’ 발족식을 열었다. 그날 모임에서 박정기 아버님을 대표로, 인재근, 최의팔 목사님을 부대표로 선임했다. 인재근씨는 민가협의 총무를 맡는 등 활발하게 인권운동을 하고 계셨다. 김근태 선배의 부인이기도 했다. 최의팔 목사는 이주노동자 인권문제에 적극적으로 뛰어든 목회자이셨다. 이 모임에서 나는 총무를 맡았고, 연세대 79학번 곽진선 선배는 회계를 맡았다. 총무는 사무국장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으로 당시 비상근 활동가는 나와 윤연옥, 곽진선 세 사람뿐이었다.

발족식에는 김근태 선배님도 오셨다. 그분이야 워낙 유명하신 분이고, 내게는 운동권의 대선배님이셨다. 그때는 민가협과 함께 고문기술자 이근안을 잡는 일을 열심히 하고 계실 때였다.

“제가 처음으로 밝히는데요, 지금도 검은 지프를 보면 심장이 덜컹 내려앉아요. 경찰서 앞을 그냥 지나갈 수 없어요. 식은땀이 흘러요. 사람들은 김근태이니까 후유증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제 생각에는 고문 후유증은 평생 가는 것 같아요.”

그의 말은 내게는 충격이었다. 김근태와 같은 대단한 투사이자 민주화 운동을 선두에서 이끌고 가시는 분이 고문 후유증을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용기 있게 고문당한 일을 폭로하고, 이근안을 잡자고 나선 분인데, 그분조차 고문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하다니….

‘그럼 다른 사람들은 어떨까? 고문 후유증을 겪는 사람들이 더 많을 텐데.’

이런 생각이 저절로 들었고, 고문 피해자들을 더 많이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모임이 처음에 한 일은 국가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이었다. 문국진씨는 1980년과 1986년 두차례에 걸쳐서 경찰서에서 고문을 당했고, 이로 인해서 고문 후유증을 얻게 된 것이었다. 백승헌 변호사와 의논하여 1980년 사건은 시간도 많이 지났으므로 제외하고 1986년 사건만 법정으로 가져가기로 했다. 이를 위해서는 의사의 소견서가 필요했다.

유가협에 있던 때 윤연옥씨와 함께 신촌에 있는 ‘동교신경정신과’를 찾아갔다.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의 배기영 선생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신촌사거리를 지나서 현대백화점 건너편 강화도 가는 버스가 있는 골목에 병원이 있었다. 그분은 인상 좋은 의사였는데, 우리 얘기를 듣고는 반색을 했다. 우리는 그때 내가 오스트리아 빈에서 수집해 온 고문 관련한 자료 몇가지와 그중에 번역한 자료를 들고 갔다. 배기영 선생은 그 자료들을 보면서 말했다.

“이거면 의사 소견서를 쓸 수 있겠어요.”

문국진씨의 병원 기록들과 이들 자료를 보고 그가 작성해준 의사 소견서에서 “심인성 편집증적 정신병”으로 진단했다. 구체적으로 ‘세계보건기구(WHO)의 국제질병분류기호 298.4’에 해당한다고 적고 있었다. 의사 소견서에서 덴마크의학회의 ‘1980년 11월 고문피해자들의 정신적 피해 실태조사’를 인용하기도 했다. 이 의사 소견서를 근거로 1993년 10월15일 소장을 접수했다.

문국진, 국가배상 승소

문국진씨는 당시 조현병 증세가 재발하여서 고대구로병원에 입원 중이었다. 그는 1980년 이적표현물을 소지하고 있다가 적발되어서 서대문경찰서에서 잡혀간 뒤 고문을 당했다. 1986년 3월에는 ‘보임-다산 사건’이라는 노동운동 조직 사건으로 수배를 당했고, 그해 10월에 청량리경찰서에 자수를 했다. 자수한 다음에 3일 동안 잠을 안 재우면서 고문을 가했는데, 그때 이미 문국진씨는 똥오줌을 먹는 등의 이상행동을 보였다. 면회를 온 부모님이 사 갖고 온 통닭을 보고, “나를 통닭같이 고문시키려고 사 왔느냐”고 고함을 지르면서 난동을 피웠다. 경찰은 그런 그를 보고 “일부러 미친 척한다”면서 폭행을 가했다. 결국 그는 성동구치소 수감 중에 발작 증세를 보여서 병원에 입원했다. 사건은 기소유예로 끝나서 그는 석방되었지만, 발작 증세를 종종 일으켜왔다.

1995년 5월4일, 서울지방법원 민사합의13부는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고, 이후 대법원에서 확정되었다. 이는 신체에 직접 고문의 증거가 있는 경우에 한정해서 고문 피해를 인정해왔던 판결을 넘어서 정신적인 고문 피해까지 인정한 판결이었다.

박래군

36년째 인권운동가로 살고 있다. 유가협, 인권운동사랑방, 인권재단 사람을 거쳐서 현재는 4·16재단 운영위원장으로 일하고 있다. 저서 ‘상처는 언젠가 말을 한다’ ‘우리에겐 기억할 것이 있다’ ‘사람 곁에 사람 곁에 사람’, 공저서 ‘이따위 불평등’ ‘새로고침’ ‘살아남은 아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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