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희의 정치사기] 조선과 대한민국의 `의료 잔혹사`
조선시대 백과사전인 '증보문헌비고'를 보면 놀라운 기록이 나온다. 1807년 순조 7년에서 1835년 현종 원년까지 인구가 100만명 가량 감소했다는 내용이다. 순조 7년 당시 조선 전체 인구가 756만1463명임을 감안하면 결코 적지 않은 숫자다. 전체 인구의 13% 정도가 줄은 셈이다.
이유는 무엇일까. 역병이다. 조선 후기 주된 역병으로는 콜레라, 두창, 성홍열, 장티푸스, 이질, 홍역 등이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이들로 인해 사망자가 많이 발생한 사례가 심심치 않게 나온다. 1660년~1864년 간 모두 79차례나 있었고, 10만명 이상 죽은 경우도 6차례나 등장한다. 어떤 해에는 50만명 이상이 사망하기도 했다.
당시 의술로는 역병을 잡기란 불가능했다. 한성부에서 환자에게 영양소를 공급하거나 성밖으로 격리하는 등의 조치는 했지만, 병을 일으키는 '본질'과 '원인'에 대한 과학적인 인식은 부족했다. "전염하는 것이 거센 불길과 같은데 치료할 방법이 없다. 옛 처방이 없다. 의원조차 어떤 증세인지 모른다"는 실록의 1821년 기록은 당시의 현실을 반영한다.
해결책은 전염병이 창궐한 지역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백성들은 자신의 생활터전을 버리고 오랫동안 산간벽촌에서 살다 돌아오기도 했고, 전국을 유랑하면서 굶주림과 싸웠다. 너무 처참했다. 기록을 보면 "남편이 굶어 죽어가도 자신의 죽그릇을 놓지 않고 죽을 퍼먹는다", "서너살 난 어린아이를 버리고 도망갔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특히 "굶주림 끝에 자식을 죽여 먹기도 했다"는 묘사는 충격적이다.
200여년이 지난 지금의 모습은 어떠한가. 이제는 의료 기술이 발달해 전염병으로 죽는 사람은 줄었다. 다만 이제는 의사가 현장에 없어 환자들이 죽어간다. 역사의 아이러니다.
정부가 지난 2월 2025학년도 입시에서 의대 정원을 2000명 늘린다고 발표한 이후 전공의가 집단 사직하는 등 전면 파업에 돌입했고, 응급환자들은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하고 있다. 두 살 배기 아기가 11차례 '응급실 뺑뺑이' 끝에 의식 불명에 빠지고, 공사장에서 추락한 70대 노동자가 4시간 이상 병원을 찾지 못해 숨진다.
이런 응급대란을 막기 위해 투입된 군의관들은 현장 경험과 진료 역량 부족 등을 이유로 속속 원부대로 복귀하거나 다른 업무에 배치되고 있다.
어찌보면 과거보다 더 불행할 수도 있다. 충분히 치료를 받으면 나을 수 있는데 그렇지 못했기 때문이다. 환자를 살려야 하는 의사에게 1차적 책임을 물을 수 밖에 없다. 정부 정책에 맞서 자기 주장을 한다는 이유로 현장을 떠나는 행위는 참으로 무책임하다.
인간의 생명은 어떤 것과도 거래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영국 등 주요 선진국도 의사들이 근무조건 등을 놓고 파업하지만, 우리처럼 환자를 버려두고 집단 행동을 하는 나라는 없다. 현재의 파업이 의사들의 밥그릇 욕심이라고 치부하는 세간의 인식을 뛰어넘으려면 현장으로 돌아와야 한다.
의대 정원 증진을 추진하는 윤석열 대통령과 정부·여당도 인식을 바꿔야 한다."응급실 뺑뺑이 사망 증가 주장이 근거가 없다"(대통령실), "경증의 기준은 본인이 전화해서 병원을 알아볼 수 있는 수준"(박민수 보건복지부 차관) 등으로 현 상황을 호도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지난 3~5일 한국갤럽 조사에선 의대 정원 확대가 윤 대통령 직무 수행 부정평가 이유 1위로 꼽혔다. '응급실 뺑뺑이'로 숨지는 이가 나오며 갈수록 악화하는 여론과 무관치 않다.
그나마 뒤늦게라도 대통령실과 여야 정치권이 '여야의정 협의체'를 구성한다고 밝히고 대화에 나선 것은 참으로 다행이다. 의료계가 "내년과 내후년 의대 정원 원점 재검토 수용 없이는 협의체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지만, 한걸음 양보하면서 대화의 장을 열었다는 점은 진일보한 일이다. 충분한 토론을 통해 해법을 찾아, 더 이상 의료계 잔혹사가 되풀이되지 않길 바란다.
김세희기자 saehee0127@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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