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여덟 어른, 엄마가 되었을 때 [똑똑! 한국사회]
허진이 | 자립준비청년
지난 주말, 어린 시절 같은 보육원에서 함께 자란 친구의 집에 다녀왔다. 친구는 최근에 출산을 해 어느새 한 가정의 아내이자 엄마가 되어 있었다. 친구와 철없이 보낸 학창 시절이 기억에 선명한데 이제는 능숙하게 아이를 돌보고, 심지어는 자신의 집 마당 텃밭에서 키우는 작물의 특징을 잘 아는 멋진 엄마가 된 모습을 보니 신기하면서도 가슴 한편이 뭉클해졌다.
친구가 겨우 아이를 재우고 나서야 둘이 대화할 수 있는 시간이 생겼다. 우리 대화의 주제는 출산과 육아였다. 아무래도 처음 겪는 일에 친구는 고민이 많은 듯, 올해 결혼 6년차에 곧 세돌을 앞둔 아이가 있는 내게 이런저런 질문을 퍼부었다. 아기의 태열을 낮추는 방법, 아기 피부에 좋은 제품, 분유와 기저귀를 저렴하게 살 수 있는 방법 등 실생활에 필요한 정보들을 물었고, 나는 그간 터득한 나만의 육아 노하우를 알려주었다.
친구와 고민을 나누다 보니 문득 ‘어느새 내가 육아 선배가 되어 있구나’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3년 전 부모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막막함에 눈물을 흘리던 때가 떠올랐다. 보육원 친구들 중 가장 빨리 가정을 이뤘던 나는 누구에게도 궁금한 것을 물어볼 수가 없었고, 부모님 도움 없이 아기 키우는 일이 쉽지 않다며 겁을 주는 사람도 있었다. 당시에는 ‘난 좋은 부모가 될 수 없나 봐’라며 울었던 내가 지금은 육아 선배가 되어 친구의 막막함을 덜어주고 있다니 뿌듯하고 만족스러웠다.
자립준비청년들에게는 처음 하는 모든 일이 남들보다 막막하게 느껴진다. 고민을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을 어른을 만나기 쉽지 않은데다가 주변 친구들에게 도움을 구하려면 부족함을 드러낼 때 느낄 부끄러움을 이겨낼 용기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외손뼉만으로는 소리를 내기 어렵다’는 옛말처럼 어떤 일들은 혼자서 해결하기 어려워서 주변의 지혜나 혜안이 필요하다. 고민이 많던 친구에게 그 어떤 답변보다 내 경험과 이를 통해 얻은 노하우가 가장 힘이 되었던 것처럼 말이다.
안타깝지만 자립준비청년에게는 자신의 경험을 들려줄 존재가 많지 않다. 이럴 때는 주변의 것을 보고 듣고 배우는 것이 도움이 된다. 대학 시절 나는 새로 사귀게 된 친구들의 집에 놀러 가는 일이 자주 있었다. 어떤 집은 종일 커튼을 닫고 생활하고, 어떤 집은 반찬을 그릇에 덜지 않고 통째로 먹기도 했다. 양육자가 있는 집은 처음 방문해보았기에 집마다 다양하게 살아가는 것을 그때 처음 알게 됐다. 그렇게 친구들의 집을 다니며 ‘내 집이 생긴다면 나는 6인용 식탁을 사야지’, ‘집에 티브이를 두지 않아야겠다’ 등 미래에 내가 꾸릴 가정을 구체적으로 상상해볼 수 있었다. 그때 터득한 내 취향은 결혼 후에 남편과 함께 살 집을 꾸미는 데 사용되었고 직접 경험하기 어려운 일들은 간접경험으로도 채울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간접경험은 내게 ‘처음 있는 일’의 막막함뿐 아니라 시행착오도 줄여주었고 ‘나다움’도 찾게 해주었다.
지금 우리 사회에는 수많은 ‘처음’ 앞에 서 있는 자립준비청년들이 있다. 어렵고 두렵기만 한 ‘처음’을 쉽게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다양한 곳에 가 보거나 여러 사람과 만나 이야기하는 방법이 있다는 것을 전하고 싶다. 무엇보다 내가 친구에게 육아 노하우를 알려준 것처럼 내가 한 시행착오를 들려주는 것만으로도 이들의 새출발이 한결 가벼워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런 마음을 담아 아름다운재단 ‘열여덟 어른’ 캠페인을 통해 ‘엄마 허진이’ 프로젝트를 준비하고 있다. 프로젝트에서는 자립준비청년 선배이자 한 가정의 아내, 엄마인 내 경험을 전하려 한다. 내가 들려주는 다양한 이야기 속에서 저마다 자신의 ‘처음’을 상상하고 준비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끝에는 많은 자립준비청년이 자신만의 것을 이룰 수 있기를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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