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올림피아드 강국은 옛말…10년 전 우승국에서 20위로 추락
의대 진학한다고 수상 실적 입시 활용 금지
올림피아드 혜택 사라지자 과학 영재들 외면
“기초과학 바로미터…정부 지원으로 열정 키워야”
지난달 2일 여러 언론에서 ‘韓 대표단, 국제화학올림피아드 ‘전원 메달’ 쾌거’ ‘韓과학영재, 국제화학올림피아드 메달 싹쓸이’란 제목을 달고 기사를 내보냈다. 정부의 대한민국 정책브리핑 사이트도 ‘국제화학올림피아드 한국대표단 4명 전원 메달 ‘쾌거’'란 제목을 달았다. 당시 파리 올림픽에서 메달을 딴 국가대표에 환호하던 터라, 국민은 한국 과학 영재가 전원 메달을 땄다고 칭찬했다.
하지만 정부나 언론 모두 사실을 제대로 전하지 못했다. 과학올림피아드 참가자들은 대부분 메달을 받는다. 정부브리핑이나 기사들은 전원 메달 획득보다 더 중요한 국가 순위는 빠뜨렸다. 우리나라는 1992년 국제화학올림피아드에 처음 출전해 20위를 기록한 이래 2011~2015년 사이 4번이나 우승을 차지했다. 세계 최상위 국가이던 한국이 올해는 84국 중 20위가 돼 32년 전 첫 출전 때로 퇴보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한국창의재단은 국제과학올림피아드 대표단 선발과 대회 출전 등을 지원하고 대회 결과를 보도자료로 알린다. 과목마다 보도자료 내용이 조금씩 달랐지만 제목은 모두 한국대표단이 전원 메달을 획득했다거나 전원 수상했다는 식이었다. 과기부와 창의재단 관계자들은 국가 순위를 알려 달라고 하자 모두 “어린 학생들의 선전에 응원해 달라”고 답했다. 한국 순위가 매년 내리막을 걷자 아예 순위를 보도자료에서 빼버리고는 학생들의 뒤에 숨은 것이다. 과학계는 “과학올림피아드가 최고 영재들로부터 외면 받은 현실을 보여주는 결과인데 그 사실을 숨긴 것”이라고 비판했다.
◇올림피아드 강국, 10여년 만에 관심 사라져
한국은 불과 10여년 전만 해도 ‘눈 가리고 아웅’ 할 필요가 없는 과학올림피아드 강국이었다. 국제과학올림피아드의 주요 과목은 수학, 물리, 화학, 정보, 생물, 물리토너먼트, 천문, 지구과학, 중등과학이다. 한국이 이 9개 과목에 모두 대표단을 보내기 시작한 건 2007년부터다. 한국은 2011년과 2012년에 각각 5개 과목에서 종합순위 1위를 차지했다. 이 때가 국제과학올림피아드에서 한국의 최전성기다. 2011년에는 물리, 화학, 물리토너먼트, 천문, 지구과학에 1위를 차지했고, 2012년에는 수학, 화학, 물리토너먼트, 천문, 지구과학에서 1위를 차지했다.
하지만 이후 성적이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2020년과 2022년에는 1위를 차지한 과목이 하나도 없었다. 작년에 물리에서 1위를 탈환했지만, 올해 또다시 1위를 차지한 과목이 하나도 없었다. 대부분의 과목에서 순위가 평소보다 떨어졌다. 순위를 보도자료에 넣기 민망할 정도였다는 말이 나온다.
국제과학올림피아드 강국이던 한국이 내리막길을 걷게 된 이유는 뭘까. 과학계는 한국 과학영재들의 수준이 떨어졌다기 보다 과학올림피아드에 대한 관심이 줄은 탓이라고 설명한다. 올림피아드 성적이 대학 진학에 별 도움이 되지 않아 최고 영재들이 대회 출전으로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다고 본다는 것이다. 실제로 2014년부터 대학 입시 자기소개서에 국제과학올림피아드 수상 실적을 쓰지 못하도록 했다.
국제생물올림피아드 한국대표단을 이끈 김재근 서울대 생물교육과 교수는 “우리나라에서 과학올림피아드가 최전성기일 때는 올림피아드 성적이 대학 입시에 반영되던 때였고, 그때는 중학교 때부터 올림피아드를 준비했다”며 “2014년부터 대학 입시 자기소개서에 올림피아드 수상 실적을 쓸 수 없게 되면서 참여자가 급격하게 줄었다”고 말했다.
◇수상자 의대 진학 비판받자 대학입시 혜택 없애
2014년부터 이공계 대학 진학에서 올림피아드 실적을 내세우지 못하게 한 것은 대회 수상자들이 기초과학이 아니라 의대로 대거 진학했기 때문이다. 한국이 과학올림피아드 최전성기이던 2011~2013년 대회 참가자 중 대학에 진학한 학생은 모두 84명. 이 중 28.6%인 24명이 의약 계열로 입학했다. 상위권인 수상자들의 이탈은 더욱 심각했다. 2008~2011년 화학·물리·생물 올림피아드 수상자의 의대 진학률은 각각 70.0%, 59.1%, 55.6%였다.
올림피아드 실적을 입시에 활용하지 못하자 의대를 준비하던 최고 영재들이 과학올림피아드를 외면했다. 한국지구과학올림피아드위원회 위원장을 맡은 이효녕 경북대 지구과학교육과 교수는 “대학 입시에 올림피아드 성적이 반영되지 않다 보니 과학고나 영재고에서도 의대 입시를 준비하는 최상위권 학생들이 올림피아드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고 말했다. 과거에는 과학고나 영재고를 다니는 올림피아드 수상자가 의대를 가는 게 문제였다면, 이제는 의대를 준비하는 과학고나 영재고의 최상위권 학생들이 올림피아드에 아예 관심조차 가지지 않으면서 올림피아드 성적이 떨어졌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과학올림피아드 뿐만 아니라 과학 관련 발명품 대회나 외부 수상 실적이 모두 생활기록부에 기재되지 않다 보니 학생 입장에서는 열심히 교외 활동을 하더라도 혜택이 없는 셈”이라며 “대만 같은 나라는 과학올림피아드에서 금메달을 받으면 원하는 대학도 갈 수 있도록 해주는데 우리는 아무런 혜택이 없다”고 말했다.
과학올림피아드가 학생들의 관심에서 멀어지면서 참가자 자체가 줄고 있다. 이 교수에 따르면 올해 국제지구과학올림피아드에 출전할 대표단을 뽑는데 일본에서는 2000여명, 대만에서는 500여명의 학생이 지원했고 그 중에서 대표단을 4명 뽑았다. 반면 한국에서는 중학교 3학년을 포함해도 150명이 전부였다. 그는 “교육 시키고 1차 선발하면 60명 정도가 남는데,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며 “영재는 영재대로 지원을 해줘야 하는데, 정책은 하향평준화로만 움직인다”고 비판했다.
국제수학올림피아드 한국대표단 단장을 맡은 최수영 아주대 수학과 교수의 진단도 비슷하다. 최 교수는 “올림피아드는 학생들이 무리해서 도전할 수 있는 동기 자체가 많이 약화됐다”며 “대회에 참여하는 학생들의 풀(pool, 인적 자원)이 줄어들면서 과거만큼 좋은 성적을 낼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고 말했다.
◇의대 열풍에 과학고·영재고 중도 이탈도 심각
입시 제도가 바뀌자 이제 의대를 목표로 하는 최고 영재들이 굳이 과학고와 영재고를 고집하지 않는다. 과학고, 영재고가 주축인 올림피아드 대표단의 성적이 하락하는 것도 그 결과이다. 전국 20개 과학고와 7개 영재고의 중도 이탈 학생 수는 2014년과 2015년에 각각 44명, 19명이었다. 이후 꾸준히 늘어 작년에는 66명에 달했다. 학교알리미에 공시를 하지 않는 한국과학영재학교는 제외한 숫자다.
학생들이 과학고나 영재고를 이탈하는 것은 학교를 졸업하고 의대로 진학하면 불이익을 받기 때문이다. 과학고와 영재고는 재학생에게 의대 진학을 포기하도록 각서를 제출하게 하거나 의학계열 진학 시 무상 제공한 등록금을 환불하는 식의 불이익을 주는 경우가 많다. 과학고나 영재고가 의대 진학을 준비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다 보니 아예 포기하는 학생이 늘고 있다는 이야기다.
입시전문가인 임성호 종로학원 대표는 “과학고나 영재고를 그만두는 학생들은 자기 혼자 공부해서 수능 보거나 정시로 의대를 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며 “어차피 과학이나 영어는 문제가 없는 학생들이기 때문에 국어 한 과목만 열심히 공부하면 대부분 의대를 간다”고 말했다.
이덕환 서강대 화학·과학커뮤니케이션 명예교수는 한국만의 잘못된 입시 문화가 이런 상황을 만들었다고 꼬집었다. 이 명예교수는 “학생들이 올림피아드에 나갈 시간에 입시 준비하는 게 진학에 유리하다는 판단을 하고 입시와 관련이 없는 부분에는 아무런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며 “왜곡된 입시 제도의 파편이 올림피아드에 튄 것”이라고 말했다.
◇기초과학 열정도 흔들… “올림피아드 혜택 부활해야”
과학기술계는 과학올림피아드 문제가 곧 과학계 저변의 축소를 보여준다고 우려한다. 사교육과 의대 열풍을 막는다는 이유로 과학올림피아드 성적을 대학 입시에 활용하지 못하게 하면서 기초과학에 열정을 가진 학생들마저 올림피아드에 매진할 동기 자체를 없앤다는 지적도 나온다.
최수영 교수는 “올림피아드를 준비했다고 하면 사교육을 많이 받았다느니, 의대 가려고 했다느니 하면서 학생들을 싸잡아 보는 경향이 있었다”며 “학생들은 수학을 좋아해서 올림피아드에 도전하는데 줄 수 있는 당근은 아무것도 없다보니 지원 자체가 줄어든 것”이라고 말했다. 최 교수는 “올림피아드를 의대를 갈 수 있는 도구로 만들자는 게 아니라 최소한 불이익은 없애고, 사회적인 관심은 줘야 하지 않나 싶다”고 했다.
이효녕 교수는 과학올림피아드 수상자들에게 여러 혜택을 주는 일본이나 대만처럼 우리도 적극적인 베네핏(benefit. 혜택)을 주고, 수상자를 이공계 인재로 키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교수는 “과학올림피아드는 나라를 먹여 살릴 인재를 키우는 무대인데 지금 같은 추세라면 한국은 도태될 수밖에 없다”며 “지난 10년 간 과학올림피아드에 대한 정부 차원의 예산이 제자리걸음인데, 지원을 늘리지 않으면 전반적인 과학 수준이 낮아지고 하향 평준화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임성호 종로학원 대표도 과학올림피아드에 대한 정부 정책이 유연하게 바뀌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임 대표는 “정부 정책이 전반적인 입시 부담을 줄여주는 데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며 “상위권 학생들을 자꾸 통제하고, 하고 싶은 것을 못 하게 만드는데 이런 정책은 국가경쟁력의 손실로 이어질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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