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으로 허위자백’ 전직 남파공작원 엄주분씨 99살로 숨져

고경태 기자 2024. 9. 9. 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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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 스스로 '남파공작원'이었던 사실을 밝히며, 1950년대 고문에 의한 허위자백에 바탕한 판결에 대해 지난해 재심을 신청했던 엄주분씨가 분단의 비극으로 얼룩진 한 많은 삶을 뒤로하고 영면에 들었다.

책을 집필하는 과정에서 엄주분씨의 존재를 추적해 찾아낸 뒤 정기적으로 만나 인터뷰를 해왔던 김두식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한겨레에 "8월26일 월요일에 마지막으로 뵈었다. 그날이 40차 인터뷰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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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8월14일 본인이 기거 중인 경기도 안양의 한 요양원 면회실에서 한겨레와 만난 엄주분씨.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본인 스스로 ‘남파공작원’이었던 사실을 밝히며, 1950년대 고문에 의한 허위자백에 바탕한 판결에 대해 지난해 재심을 신청했던 엄주분씨가 분단의 비극으로 얼룩진 한 많은 삶을 뒤로하고 영면에 들었다. 향년 99.

엄주분씨의 딸 박예춘(76)씨는 9일 한겨레에 “어머니가 8월부터 잘 드시지 않아 마지막이라는 걸 예감하고 여러 차례 임종예배를 드렸다. 4일 밤부터 물도 못 넘기시길래 호스피스 병동으로 옮겨야 하나 생각하던 중 오늘 아침 6시10분 편히 떠나셨다”고 말했다.

1925년 충남 연기에서 태어난 엄씨는 소학교 시절 은사의 영향으로 사회주의 활동을 시작했고, 한국전쟁 때 월북해 1957년 평화통일 선전 목적으로 남파됐다. 이후 특별한 공작활동 없이 부산에서 생계를 이어가다 1958년 부산에서 체포돼 부산 해병대 특무대 등에 구금돼 모진 고문을 받았다. 불법 구금·고문 과정에서 나온 자백을 근거로 1·2심에서 사형이 선고됐고, 1960년 대법원은 무기징역형을 확정했다. 1962년 3월 수감 중 전향한 뒤 1979년 대전교도소에서 가석방됐다.

교도소를 나온 뒤 교회 화단 관리 등 봉사 활동을 하며 살아 온 엄씨는 98살이었던 지난해, 당시 판결에 대한 재심 신청에 나섰다. 남파 뒤 정착 과정에서 만난 이웃들이 자신 때문에 구타와 고문, 실형을 산 것에 대한 미안함과 책임감 때문이었다. 지난해 12월 엄씨는 한겨레와 인터뷰에서 “저와의 만남 때문에 고문을 받고 자백한 그분들의 명예는 지금이라도 회복돼야 한다. 아마도 이 사건 때문에 인생이 완전히 망가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박시환·김진한·조영관·황준협 등 4명으로 구성된 변호인단은 지난해 12월6일 대법원에 신청한 재심신청서에서 △민간인 수사권이 없는 국군 수사기관이 엄씨를 수사·체포했고 △장시간 불법체포 구금 상태에서 자백이 이뤄졌으며 △남파 공작원은 맞지만 형법상 간첩죄 행위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엄씨의 간첩 행위 유죄 판결은 취소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책을 집필하는 과정에서 엄주분씨의 존재를 추적해 찾아낸 뒤 정기적으로 만나 인터뷰를 해왔던 김두식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한겨레에 “8월26일 월요일에 마지막으로 뵈었다. 그날이 40차 인터뷰였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100년을 살아보니 인생이 어떻냐는 질문에 ‘백 년 살지 않았어요’라고 대답했다”며 “마지막까지 깐깐하셨다”고 했다. 엄씨는 1925년생으로 올해 만 99살이다.

변호인 중 한 명인 김진한 변호사는 “대법원이 아직 재심 개시 결정을 안 했다. 당사자가 돌아가셔서 이 소송은 종료 절차를 밟고 따님 이름으로 새로운 청구를 제기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빈소는 안양장례식장. 발인은 11일.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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