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 “입만 나오는 무거운 구속복 입히고 죽기 직전까지 때려 충격”
대구희망원-서울갱생원-성지원-양지원 거친 60대 남성의 삶
민간인 학살의 광풍이 전국을 휩쓴 한국전쟁이 끝나고 난 뒤, 이번에는 납치와 감금의 시대가 시작됐다. 시설 수용을 중심으로 한 정부의 부랑인 정책은 시설 쪽 이해와 결합하면서 부랑인만을 표적으로 삼지 않았다. 술 취해 행패를 부린다고, 일정한 주거 없이 배회한다고, 행색이 초라하다고, 심지어는 얼굴이 창백하다고 경찰과 단속반원에 잡혀가 짐승처럼 ‘사육’됐다. 헌법에 명시된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 ‘신체의 자유’는 무시되었고, 이는 내무부 훈령 제410호, 구걸행위자보호대책, 보건사회부 훈령 제523호로 뒷받침되면서 형식적 민주화를 이룬 1987년 이후에도 지속됐다. 1987년부터 폭로된 부산 최대의 부랑인수용시설 형제복지원이 다가 아니었다. 서울시립갱생원, 대구시립희망원, 충남 천성원(대전 성지원, 연기군 양지원), 경기 성혜원 등 5곳(4개 법인)에 대한 진실화해위의 대규모 인권침해 진실규명을 계기로 이 문제를 다각도로 들여다봤다.
이영철(가명·66)씨가 처음으로 ‘집’에서 살게 된 건 2022년이라고 했다. 1973년 처음 시설에 들어간 지 49년만이었다.
서울시립갱생원, 대구시립희망원, 충남 천성원 산하 대전 성지원 및 연기군 양지원을 모두 거치고 1998년부터 서울역과 동대문운동장역 근처에서 노숙을 하다 2년 전에야 임대주택에서 주거의 안정을 얻었다는 그가 9일 오전 기자들 앞에 섰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가 주최한 ‘서울시립갱생원 등 성인부랑인시설 인권침해사건’ 진실규명 결정 발표 기자간담회 자리였다.
2011년 버스와 부딪치는 사고가 나 두개골이 함몰되고 청각 손상 등 후유증이 생겼다는 그의 말은 자꾸만 새어 알아듣기 힘들었다. 간절한 표정에서는 굴곡진 삶이 엿보였다. 1958년 대구에서 태어난 이씨는 이번에 진실화해위가 진실규명한 5곳 중 4곳에서 인간 이하의 삶을 차례로 경험했다. 시설에서 나와선 노숙이 기다렸다. 사기꾼이 기다렸다. 기자간담회에서의 증언과 진실화해위 자료에 기초해 이영철씨의 삶을 재구성해보았다.
1971년 중학교를 중퇴하고 서울로 상경해 중국집 배달 등을 하다 1973년 가을 대구역 대합실에서 단속돼 대구시립희망원에 강제수용된 게 시작이었다. 대구시립희망원에서는 밖을 내다볼 수 없는 방에 30명 정도가 갇혀 생활했고, 옷을 깨끗이 세탁하지 않는다는 등의 이유로 폭행을 당했다고 한다. 모든 출입문에는 쇠창살 및 자물쇠가 달려 있어 내부에서 문을 열 수 없었으며, 각 방에서 복도 방향으로 쪽창이 나 있어 환기 및 채광이 원활하지 않아 감옥과 유사했다고 한다. 이씨는 “창문이 천장 바로 밑에 붙어 있어서 밖을 내다볼 수 없었다”고 진술했다. 그나마 한 달 뒤에 어머니의 인계로 퇴소할 수 있었으나 얼마 가지 않았다.
1974년에는 용산역 대합실에서 단속되어 서울시립아동상담소에 수용되었다가 2년 후 문고리 공장에 취업되어 퇴소했다. 그리고 한참이 흘러 1981년 3월 을지로입구 인근 공원 의자에 앉아 있다가 서울 중구청 직원 단속으로 이번엔 서울시립갱생원에 강제수용되었다. 부방장을 맡아서 식사 배식을 했으며, 철공소·페인트·용접·가죽공장 등에서 일하고 일주일마다 1000원씩 받았다. 서울시립갱생원에서 도망치다가 붙잡히거나, 수용자 간에 싸움이 벌어지면 독방에 수용됐으며, 독방 내부에서는 신체가 결박된 상태로 식사를 하는 등의 가혹 행위를 당했다고 한다.
진실화해위는 “서울갱생원은 수용자에 대한 처벌 목적으로 통·방장 등 간부가 수용자에게 구속복(Straitjacket)을 강제로 입힌 후 ‘벌방’, ‘기합방’ 공간에서 폭행을 가한 것으로 확인된다”고 밝혔다. 1978년 입소한 또 다른 수용자에 따르면 “처음에 들어가면 군기를 잡으려는지 방장 같은 사람이 무조건 때렸는데, 40대 한 사람이 왜 때리느냐고 저항하자 여러 명이 붙들어 구속복을 강제로 입힌 후 죽기 직전까지 때리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진술했다.
이영철씨도 “도망가다가 붙잡혀 오거나 타 원생을 괴롭히는 사람들이 독방에 갔다. 독방에서는 엄청 무거운 옷을 입혀놨는데, 그 옷은 다른 데는 다 막혀 있고 입만 뚫려 있었다. 너무 무거워서 손을 움직일 수 없는데 그 상태로 밥을 먹어야 했다”고 진술했다.
이후 서울시립갱생원에서 차비를 받고 퇴소했는데, 고향 대구로 가던 중 차비를 다 써서 대전역 파출소에 찾아갔다가 천성원 산하 대전 성지원에 강제수용되었다. 그를 포함해 1983년에 성지원 수용자들은 같은 천성원이 운영하는 충남 연기군 양지원으로 대규모 전원되었고, 양지원 및 정신요양원 송현원 건물 공사에 투입됐다고 한다. 이씨는 1986년부터 양지원 총무 박아무개씨에 의해 선도원으로 임명되어 수용자 감시 업무를 했다고 진술했다. 1998년 원생 박영섭씨 등의 폭로로 양지원 인권침해 상황이 외부로 알려져 국회의원 방문 조사가 이뤄졌으며, 이때 경찰과 면담한 뒤 적금 70만원을 받고 퇴소했다.
그는 양지원에서 부랑아시설 신축 강제노동에 동원되기도 했다. 1983년 여름경부터 염소사육장만 있는 공지에서 오전 7시부터 오후 7시까지 하루 12시간씩 ”곡괭이나 손으로 땅을 일일이 파헤치는 등의 방식으로 양지원 내 모든 건물을 수용자들이 직접 건설했다“라고 진술했다.
이는 보건사회부가 1982년 5월 연기군을 비롯한 각 시도에 내린 지시에 따른 것이다. 보건사회부는 당시 “부랑인시설 신축이 지연되는 등 사업 추진에 차질이 있다”며 ”시설 자체의 유휴 노동력을 활용함으로써 사업비도 절약되고 자활사업 효과도 거둘 수 있게 하면서 부실공사가 되는 것을 방지하고, 절약된 예산으로 시설에 필요한 건축이 되게 하여 당초 계획상의 목표보다 초과 달성하도록 노력하라”고 했다. 형제복지원이 수용자들을 동원해 시설을 건축한 사례는 사업비 절감의 모범 사례로서 당국 방침에도 반영됐다. 시설 수용자들을 ‘유휴노동력’이라는 이름으로 노예처럼 부려먹은 것이다.
그는 “신축공사 중 산비탈면이 무너지면서 흘러내린 흙에 사람이 묻히는 인명사고도 발생했다”고 증언했다. 진실화해위에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산비탈 아래에서 일하다가 흙에 파묻힌 사람도 있습니다. 그 사람은 개미고개 공동묘지(양지원 사망자가 매장됐다는 송성리 공동묘지)에 묻혔습니다. 이때 제대로 묻어주는 게 아닙니다. 그냥 마대에 넣어서 묻는데, 여름엔 땅을 파기 쉬운데 겨울에는 땅이 얼어 있으니까 대강 파고 흙으로 덮어줍니다. 비가 많이 오면 땅이 파여서 뼈가 밖으로 흘러 나왔습니다. 마을 주민들이 항의해도 양지원 직원들은 그냥 욕하고 말았습니다.”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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