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 유명 화랑 ‘들러리 노릇’ 여전한 한국 미술관

노형석 기자 2024. 9. 9.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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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력 작가들 작품 기획전 형식 미리 홍보
프리즈·키아프 ‘해외 자본 마케팅 전장’돼
키아프 전시 마지막 날인 지난 8일 오후 한 외국 갤러리의 피카소 판화전 전시장 앞에 젊은 관객들이 긴 줄을 서서 감상할 차례를 기다리는 진풍경이 연출됐다. 노형석 기자

주식 시장의 ‘작전’이나 짜고 치는 ‘고스톱’과 어떻게 다른가.

지난 4~8일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국내외 미술계의 관심을 받으며 나란히 열린 국제미술품장터(아트페어) 프리즈 서울과 키아프 행사 기간에 한국 미술관들은 서구 유력 화랑들의 전속작가를 대놓고 홍보하는 무대나 배경으로 들러리 노릇을 했다.

단적인 예로, 유럽 화랑인 타데우스 로팍은 프리즈 서울 개막 전날인 3일 중견 개념미술가 이강소씨의 전속작가 계약 사실을 담은 보도자료를 배포하면서, 국립현대미술관이 아직 공식 발표하지 않은 그의 11월 국립현대미술관 개인전과 2일부터 시작한 일부 출품작 팝업 전시 소식까지 알렸다.

국가미술관을 따돌리고 일방적으로 전시 사실을 자신들과 연관된 프로젝트처럼 포장한 것이다. 미술인들 사이에 뒷말이 일자 이 화랑은 다음날 정정 보도자료를 돌려, 국립현대미술관 전시는 자신들과 협업한 것이 아니라고 해명했고, 국립현대미술관 쪽은 사흘이 지난 6일에야 이 작가의 개인전과 출품작 팝업 전시 소식을 뒤늦게 알렸다.

서구 일류급 화랑인 하우저앤워스에서 최근 의욕적으로 마케팅 중인 스위스 40대 작가 니콜라스 파티가 지난달 29일 시작한 호암미술관 전시회도 개운치 않은 뒷맛을 남겼다.

그는 삼성가의 호암미술관에서 미술관 소장 한반도 불교미술사 명품들을 소품처럼 배치하면서 1·2층 전관에 감각적인 신작들을 선보였는데, 경매사와 소속 화랑 매장 집중 홍보가 이어졌다. 프리즈 서울 개막을 앞두고 국제경매사 필립스옥션이 서울 북촌 송원아트센터에 그의 대형 그림들을 배치하는가 하면, 소속 화랑도 그의 대작들을 프리즈 서울 전시장의 잘 보이는 자리에 놓아 250만달러(약 33억5천만원)에 판매하는 성과를 올렸다.

서울 코엑스 3층 프리즈 서울 아트페어 전시장. 글래드스톤 갤러리에서 설치한 한국계 미국 작가 아니카 이의 부스에서 관객들이 방산충 설치작품을 감상하고 있다. 노형석 기자

페이스갤러리 소속으로 서울 용산 아모레퍼시픽 뮤지엄에서 프리즈 서울 직전 실내가옥을 재현하는 대규모 설치작품전을 시작한 작가 듀오 엘름그린 앤드 드라그셋, 리움미술관에서 생태주의적 맥락의 키네틱 설치작품전을 연 아니카 이도 예외는 아니었다. 리움에 나온 벌레 모양의 발광 키네틱 작품 방산충은 프리즈 서울 글래드스톤 매장의 별도 독립 진열 부스에서 역시 대표작으로 판매됐다.

이런 식으로 미술관과 유력 화랑이 행사 수년 전부터 아트페어 시점을 예상하고 판촉하려는 유력 작가의 작품들을 기획전 형식으로 미리 홍보하는 것은 서구에서도 종종 있어왔다. 하지만 올해 프리즈·키아프는 유난히 정도가 심하다는 평이다. 이는 다른 말로 그만큼 한국 미술시장이 서구 자본의 본격적인 마케팅 전장으로 인지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실제로 지난 2~5일 서울 을지로, 한남동, 삼청동, 청담동 등지의 미술관·갤러리에서 벌어진 나이트 행사나, 한국화랑협회가 주최하는 키아프의 한국 화랑 매장 특별전 현장에선 서구 미술시장의 스타일과 관습을 따라가겠다는 강렬한 의지가 엿보이기도 했다. 특히 지난 4일 ‘삼청 나이트’ 때 옛 고택이나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국제갤러리 등에서 심야까지 펼쳐진 작가들의 퍼포먼스 공연과 토크, 무료로 제공되는 술과 안주 잔치 등에서는 미술시장의 경쟁 도시 홍콩과는 다른 활력을 보여줘야 한다는 절박감도 느껴졌다.

지난 3일 저녁 ‘한남 나이트’ 이벤트의 하나로 서울 이태원 파운드리 갤러리 지하 전시장에서 열린 윤미류 작가의 토크 모습. 노형석 기자

프리즈·키아프 주최 쪽 얘기를 들어보면, 7일 끝난 프리즈 서울에는 브이아이피(VIP) 사전관람이 시작된 4일부터 나흘간 7만명의 관람객이 찾아 지난해와 비슷한 양상을 보였다. 8일 끝난 키아프에는 5일간 8만2천여명이 다녀갔는데, 마지막 날 방문객이 1만2천명으로 지난해 6천여명보다 크게 늘었고, 작품 전시 수준도 크게 올랐다는 평가여서 한국 미술시장 저변이 불황기에도 꾸준히 확대됐음을 보여줬다.

코엑스 3층에서 열린 프리즈 서울은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권 화랑들을 올해 더욱 확대한 규모로 끌어들이면서 현대미술 대가들의 중저가급 마케팅을 펼쳤다. 하지만 이미 서구 미술 흐름에 익숙한 국내 유한층 컬렉터들은 지난해와 달리 싸늘한 반응을 보이며 전에는 별로 신경쓰지 않았던 코엑스 1층 키아프 매장들로 발길을 옮겼다. 하루는 프리즈 서울, 하루는 키아프를 찾는 1·2차 관람이 관행화했다는 점은 고무적이었다. 한 화랑 관계자는 “국내 참여 화랑들이 나름 자신감을 회복한 행사가 됐다”고 전했다.

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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