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성소수자 작가 천쓰홍 "문학·영화가 청춘을 구원하지요"
(서울=연합뉴스) 김용래 기자 = "보수적인 사회에서 확실히 문학과 영화는 청춘의 영혼을 구원할 수 있어요. 한국에서도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봅니다."
대만의 젊은 거장으로 꼽히는 소설가 천쓰홍(陳思宏·48)은 9일 서울 중구 달개비에서 열린 방한 기념 기자간담회에서 성소수자로서의 차별과 냉대를 견뎌내고서 주목받는 작가로 떠오른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며 이렇게 강조했다.
대표작인 장편 '귀신들의 땅'과 '67번째 천산갑'의 한국어판을 올해 초와 최근 잇따라 출간한 작가는 한국문학번역원이 주최하는 2024 서울국제작가축제에 참석하기 위해 생애 처음으로 한국 땅을 밟았다. 현재 그는 독일 베를린에 거주하며 소설가, 번역가, 배우 등 여러 방면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지난 1월 출간된 '귀신들의 땅'은 국내에는 처음 소개된 천쓰홍의 작품으로, 대만의 양대 문학상인 금장상 문학도서부문과 금전상 연도백만대상을 받으며 대중과 평단을 사로잡은 화제작이다. 이 작품은 미국에서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르고 12개 언어로 번역 출간되는 등 북미와 유럽에서도 호평받았다.
작가는 자신의 고향 마을인 대만 중부 용징의 1980년대를 배경으로 천씨 집안의 막내아들이자 성소수자인 톈홍과 다섯 누나가 고도성장을 누리기 시작한 대만의 발전상과 상관없이 고된 나날을 보내며 성장하는 모습을 담았다.
톈홍의 일가족 이야기에는 대만의 비극적인 현대사가 겹쳐 있고, 그런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과정에서 폭력과 악습, 압제를 상징하는 귀신이 핵심적인 문학적 장치로 나온다.
이 소설은 해외 문학, 특히 대만 작가의 작품으로는 매우 이례적으로 국내 출간 이후 1만5천부가 팔려나가며 인기를 끌었다. 작가는 33세에 구상을 시작한 이 작품을 10년을 들여 집필해 43세의 나이에 완성했다고 했다.
"이 작품은 어찌 보면 실패자에 관한 책입니다. 주인공은 성소수자이지요. 대만은 동성혼이 법제화되는 등 사정이 좀 낫다고 해도 아직도 농촌 등지에서는 성소수자들이 생존하기 힘든 환경이에요. 어제저녁에도 독자와의 만남 행사에서 어떤 한국 독자분이 제 책을 읽고 자신도 성소수자라고 말씀해주셨는데, 제게는 이런 경험이 무척이나 소중해요."
'귀신들의 땅'은 작가의 자전적 경험이 짙게 녹아있다. 작가 본인은 작품의 배경인 용징의 한 농가에서 아홉번째 아이로 태어나 누나만 7명을 두고 있는데, 작가와 마찬가지로 동성애자인 소설 속 주인공도 5명의 누나를 둔 일곱번째 아이로 나온다.
작가는 "한 대가족의 모습을 통해 대만의 눈물, 근현대사에 얽힌 여러 이야기들을 하고자 했다"면서 "처음 출판사에서는 책이 안 팔릴 거라고 했는데, 이렇게 기적적으로 많은 분이 읽어주셔서 한국까지 오게 돼 영광스럽다"고 말했다.
"특히 한국어판 출간 후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한국의 많은 성소수자 독자분이 연락을 주셨습니다. 제 소설에 담긴 고통이 사실은 자신의 고통이었다고 얘기해주시더군요."
이번 방한에 맞춰 국내 출간된 또 다른 소설 '67번째 천산갑'은 천쓰홍의 최신작이다.
유년 시절 만나 평생에 걸쳐 우정과 헌신, 상처를 주고받은 한 동성애자 남성과 이성애자 여성의 복잡미묘한 관계를 통해 고독, 상처, 치유, 회복 등에 관한 인생사의 다양한 면모를 진지하게 탐구했다.
"슬프고 어두운 내용의 소설이라 미리 사죄의 말씀을 드립니다. 그런데 전 눈물의 힘을 믿어요. 우는 건 창피한 일이 아니잖아요. '울고 싶으면 크게 우세요'라고 독자들에게 말하는 그런 소설입니다."
이 작품에선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열대지역에 서식하는 동물 천산갑이 중요한 문학적 장치로 나온다. 어느 날 남자주인공 '그'의 아버지는 희귀동물인 천산갑을 키워 그 비늘을 약재로 팔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산 위의 집에 천산갑 수십 마리를 들여온다. 그런데 이 천산갑들은 오직 어린 아들인 '그'에게만 친밀감을 보인다.
이 천산갑은 남자주인공을 상징한다. 작가는 '그'를 통해 보수적인 성인식이 팽배했던 대만의 1980년대부터 동성혼이 합법화된 현재에 이르기까지 성소수자들이 겪는 고난과 비애를 생생히 그려냈다.
"대만에선 산에서 볼 수 있는 천산갑은 정말 귀엽고 부끄럼이 많은 야행성 동물이에요. 멸종위기종이기도 하고요."
작가는 성소수자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나 제도가 대만과는 판이한 한국에서도 소수자들이 용기를 잃지 않고 한 걸음씩 나아가기를 기원했다. 그 과정에서 문학과 영화는 세계를 넓게 바라보는 창이 될 수 있다고 그는 강조했다.
"어려서부터 제 정체성을 숨기려 애를 썼지만 잘 안됐어요. 세계문학을 많이 읽고 영화도 즐겨보면서 다른 세상과 각양각색의 목소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았죠. 보수적인 사회에서 영화나 문학은 상처받은 청춘의 영혼을 구원할 수 있습니다."
yongla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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