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인간 사육장’에서 정신질환자로 분류돼 빨간약을 먹었다”
진실화해위, 부랑인시설의 정신질환자 감별 문제점 확인
수용자들에게 정신질환자라는 이중 낙인 부여해 격리
민간인 학살의 광풍이 전국을 휩쓴 한국전쟁이 끝나고 난 뒤, 이번에는 납치와 감금의 시대가 시작됐다. 시설 수용을 중심으로 한 정부의 부랑인 정책은 시설 쪽 이해와 결합하면서 부랑인만을 표적으로 삼지 않았다. 술 취해 행패를 부린다고, 일정한 주거 없이 배회한다고, 행색이 초라하다고, 심지어는 얼굴이 창백하다고 경찰과 단속반원에 잡혀가 짐승처럼 ‘사육’됐다. 헌법에 명시된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 ‘신체의 자유’는 무시되었고, 이는 내무부 훈령 제410호, 구걸행위자보호대책, 보건사회부 훈령 제523호로 뒷받침되면서 형식적 민주화를 이룬 1987년 이후에도 지속됐다. 1987년부터 폭로된 부산 최대의 부랑인수용시설 형제복지원이 다가 아니었다. 서울시립갱생원, 대구시립희망원, 충남 천성원(대전 성지원, 연기군 양지원), 경기 성혜원 등 5곳(4개 법인)에 대한 진실화해위의 대규모 인권침해 진실규명을 계기로 이 문제를 다각도로 들여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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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사육장에 온 것을 환영한다.”
1992년 대구시립희망원에 입소한 고아무개씨는 기존 입소자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다. 고씨는 ‘인간 사육장’에서 직원들 퇴근 시각 직전인 4시반께 저녁식사를 하고 약을 먹었다. 수용자들은 매일 다량을 삼킨 이 약을 ‘빨간약’이라고 불렀다. 이른 시간인데도 약을 먹으면 다 쓰러졌고, 각 방문은 외부에서 잠갔다. 이 약은 조현병 등 치료에 주로 쓰이는 항정신제제 약물 ‘클로르프로마진’이었다.
보건복지부의 전신인 보건사회부는 1985년 2분기 말 기준 부랑인시설 수용자 1만4653명 중 성인은 1만1815명이며, 이중 ‘정상’은 2957명(25%), ‘정신질환자’는 4104명(34.8%)으로 파악했다. 당시 정부는 이른바 ‘기도원’으로 불리는 무인가 사설 수용시설에서 비인간적 처우를 받는 정신질환자들의 실태가 폭로되자 적극적인 시설 수용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이런 정신질환자 감별 및 분류는 시설 수용인들을 근거 없이 정신질환자로 분류해 그 비율을 높이는 결과로 이어졌다. 때문에 정부가 부랑인에게 정신질환자 낙인을 찍어 사회로부터 격리시키려 한 것이 아니냐는 분석이 나온다.
진실·화해를위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는 지난 6일 제86차 전체위원회에서 ‘서울시립갱생원 등 성인부랑인수용시설 인권침해 사건’ 진실규명(피해 인정)을 의결하며 대구시립희망원과 양지원(충남 천성원) 등 2곳에서 정신질환 진단을 통한 부당한 정신질환자 분류 및 이로 인한 인권침해 사례가 확인됐다고 밝혔다.
진실화해위 조사 결과를 보면, 대구시립희망원은 입소 시점에 의사가 아닌 직원의 간단한 면담만으로 정신분열증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이러한 조사·감별은 부랑인에 대한 편견과 불신에 기초하여 본인이 진술하는 객관적인 사실관계조차 거부하는 경향을 보였고, 이는 1차 조사‧감별에 기초하여 진행되는 정신과 의사의 진단 역시 잘못된 결론으로 이끌 가능성을 높였다.
진실화해위는 조사 과정에서 대구시립희망원 1985년 퇴소자 중 입소 당시 신상기록카드 건강상태 기록란에 정신과적 질환이 있다고 기재된 사례 6건을 선별했다. 이어 정신과 전문의 등의 자문을 받아 분석했는데, 작성자의 판단이 잘못됐거나 정신과적 증상이 있었더라도 만성적인 정신분열증일 가능성은 매우 낮은 것으로 분석됐다.
수용시설에서의 정신질환자 분류 과정이 부적절했다는 게 진실화해위의 결론이다. 진실화해위는 “대구시립희망원은 높은 비율로 정신질환 진단을 함으로써 수용자들에게 정신과 약물을 일괄 투여할 수 있게 됐고, 이를 통해 손쉽게 수용자의 행동을 통제할 수 있는 ‘화학적 구속’의 효과를 얻었다”고 밝혔다. 1992~2015년 대구 희망원에 수용됐던 고아무개씨는 “희망원은 선생님들이 5시에 퇴근하려고 저녁을 4시 반에 먹게 했다. 저녁을 일찍 먹이고 약을 먹게 하면 퇴근 시간에 맞출 수 있다. 본관 사무실에는 당직자만 한 사람 남아 있었다”라고 진술했다.
진실화해위의 참고인 조사에 응한 대구시립희망원 직원 심아무개씨 역시 “대부분 원생이 간질, 정신병이 있었기 때문에 약을 먹고 나면 대부분 축축 늘어져서 잠을 잤다. 약 같은 경우에는 운동장에 원생들을 불러서 나누어 주고 방으로 들어가기 전에 약을 삼켰는지 확인한 후 방에 들여보냈다”고 진술했다. 또한 직원들의 퇴근 시간은 “일반적인 공무원 퇴근 시간과 비슷했고 약은 해 떨어지기 전 4~5시 정도에 먹도록 했다”고 진술했다.
대구시립희망원에서 수용자들에게 먹였다는 빨간약은 클로르프로마진으로 보인다. 이 약은 빨간색 원형으로 생긴 1세대 항정신약물이다. 당시 부랑인수용시설에서는 항정신성 약물인 클로르프로마진과 할로페리돌, 진정제인 바륨, 아티반이 많이 쓰였다는 게 한겨레 인터뷰에 응한 정신의학과 전문의들의 견해였다. 이 약들은 대부분 최근 사망사고가 잇따른 춘천예현병원 등 정신병원에서도 ‘급성기 환자’에게 투약한 약이다.
한 정신의학과 전문의는 클로르프로마진과 할로페리돌 등 항정신성 약물의 경우 “장기능 저하, 팔다리 강직, 입떨림 고착화 등 여러 부작용이 있을 수 있는데, 필요 없는 사람들에게 통제 목적으로 쓰였다는 게 가장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는 또 “필요했더라도 ‘부작용 모니터링’을 하면서 용량을 차차 낮추어야 하는데 그런 노력이 전혀 없어 보인다”고 덧붙였다.
진실화해위는 또한 충남 연기군 양지원의 경우도 비슷한 문제가 드러났다고 밝혔다. 양지원은 시설 바로 맞은편에 정신요양시설 송현원을 설립하고 수용자 중 1차(1987년 1월)로 100명을, 3~4월 추가로 21명을 전원시켰는데, 당시 전원 공문에 첨부된 진단서에는 정신분열병, 기질성뇌증후군, 정신지체, 간질 등의 진단명이 부여됐지만 재원기간 정신과 진료 또는 입원치료 기록이 전혀 없었다. 송현원 전원자에 대한 정신질환 진단은 양지원에서 관리상의 편의를 위해 임의로 정신질환자로 분류한 인원에 대한 사후 승인 절차에 가깝고, 100명 이상의 진단서를 일괄 작성하고 전원시켰다는 점에서 사실상 신규 시설의 인원을 확보하기 위한 목적으로 볼 수 있다. 사실상 부랑인을 사회로부터 즉각 격리시키고 정신과 약물로 조용히 잠재울 수 있는 ‘쓰임새 많은 도구’로써 ‘정신분열병’, ‘기질성뇌증후군’ 같은 진단명을 활용해 왔음을 보여준다는 게 진실화해위의 분석이다.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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