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동원과 선동열, 누가 위인가요?” 우문에…‘빅3’ 김시진이 내놓은 현답은[이헌재의 인생홈런]

이헌재 기자 2024. 9. 9. 12:00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삼성의 에이스로 활약했던 김시진 KBO 경기운영위원장이 경기 전 박진만 삼성 감독에게 인사를 하고 있다. 동아일보 DB

롯데와 삼성이 맞붙은 1984년 한국시리즈에서 ‘빛’이 최동원(1958~2011년)이었다면 ‘어둠’은 김시진(66)이었다.

정규시즌에서 284와 3분의2이닝을 던지며 27승을 거둔 ‘무쇠팔’ 최동원은 7차전까지 열린 그해 한국시리즈에서 혼자 4승을 따내며 롯데의 우승을 이끌었다. 반면 정규시즌 다승 2위였던 김시진은 3경기에 등판해 2패만을 당했다.

숨은 사연이 있었다. 김시진은 1차전이 열리는 대구시민운동장으로 운전을 해서 가다가 어린이를 치었다. 병원 검진 결과 큰 이상이 없었지만 그는 병원에 머물며 아이 부모님에게 사과까지 한 뒤에야 야구장에 갔다. 제대로 준비하지 못한 채 나선 탓에 그는 3이닝 4실점으로 무너졌다. 3차전에서는 8회까지 2실점으로 호투하다가 롯데 홍문종의 타구에 왼발 복사뼈를 맞았다. 김시진은 들것에 실려 마운드를 떠났고 삼성은 9회 끝내기 패를 당했다. 부상을 안고 던진 6차전에서도 홈런을 맞고 무너졌다. 김시진은 “깁스를 해야 하는 상태였는데 그냥 마취제를 맞고 마운드에 섰다. 3회 정도 되니까 마취제 효과가 떨어지면서 제대로 공을 던질 수 없었다”고 했다.

삼성 에이스 시절의 김시진의 투구 모습. KBO 제공

삼성은 1986년과 1987년에도 한국시리즈에 진출했다. 김시진은 두 해 모두 190이닝 이상을 투구하며 각각 16승, 23승을 거두며 에이스 역할을 다했다. 하지만 한국시리즈 상대였던 해태에는 ‘국보 투수’ 선동열이 떠오르고 있었다.

1986년 삼성은 1승 4패로 힘 한 번 써 보지 못하고 패했다. 김시진은 2패만을 당했다. 1987년에는 4전 전패로 무너졌다. 1차전 4차전 선발이었던 김시진은 또 2패를 안았다. 김시진은 생애 세 차례의 한국시리즈에서 8번 등판해 승리 없이 7패만을 당했다. 그의 이름 앞에 ‘불운의 에이스’라는 수식어가 붙은 건 그런 이유다.

김시진은 1985년 미스터 올스타에 뽑혔다. KBO 제공

하지만 한국프로야구 역대 최고의 투수로 평가받는 최동원과 선동열에 필적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선수 중 한 명이 김시진이었다.

그에게도 영광의 순간들은 적지 않았다. 김시진과 김일융이 원투펀치로 활약한 1985년 삼성은 77승(1무 32패)을 거두며 한국시리즈를 치르지 않고 통합 우승을 차지했다. 김시진은 그해 269와 3분의2이닝을 던지며 25승 5패 평균자책점 2.00을 기록했다. 그해 올스타전에서는 1, 3차전에서 6이닝 무실점으로 호투하며 ‘미스터 올스타’에도 뽑혔다. 투수 부문 골든글러브도 그의 몫이었다.

한국프로야구 최초의 100승도 그의 차지였다. 김시진은 1987년 10월 3일 OB전에서 23승째를 거두며 최동원보다 먼저 100승 고지에 올랐다. 롯데로 깜짝 트레이드된 이후인 1989년 4월 14일 OB전에서는 연장 14회까지 무려 219개의 공을 던지며 완투승을 거뒀다.

넥센 감독 시절의 김시진과 이만수 전 SK 감독. 두 사람은 한양대 동기이자 삼성 시절 배터리였다. 동아일보 DB

최동원은 그의 오랜 친구이자 라이벌이었고, 2년 늦게 프로에 입단한 선동열은 1982년 세계선수권을 앞두고 함께 국가대표 유니폼을 입었다.

불세출의 투수 두 명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빅3’로 불렸던 그에게 야구팬들의 영원한 난제를 물었다. 최동원과 선동열 중 누가 더 좋은 투수인가 하는 것이다.

김시진은 “내게도 그 문제는 명확하게 답할 수 없는 난제다. 다만 확실한 것은 두 투수 모두 나보다는 한참 위에 있는 선수들이라는 것”이라며 “선수 때는 잠시 ‘해 볼 만 하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나도 분명 최고가 되고 싶은 욕심이 있었지만 두 선수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우문현답을 내놨다.

당시 최동원의 주무기는 폭포수처럼 떨어지는 커브였고, 선동열은 면도날같이 날카로운 슬라이더를 던졌다. 김시진은 “국제대회에 가면 (최)동원이는 한 경기에 삼진을 15개 정도 잡았다. 동원이가 커브를 던지면 상대 타자들이 무서워서 타석 뒤로 빠지곤 했다”며 “(선)동열이 역시 타자들이 엄청 까다로워했다. 단단한 하체를 기반으로 낮은 자세로 공을 던지는데다 제구까지 되니 타자들로서는 어쩔 줄 몰라 했다. 동열이도 한 경기 삼진 10개는 기본으로 잡았다”고 회상했다.

김시진 KBO 경기운영위원장이 경기 전 경기전 상황을 살피고 있다. 동아일보 DB

선수 은퇴 후 그는 코치로 꿈에 그리던 한국시리즈 우승 반지를 여러 개 받았다. 태평양 투수 코치를 시작으로 1990년대 말~2000년대 초반의 강팀이었던 현대 투수 코치를 맡아 4차례나 한국시리즈 정상에 올랐다. 그의 지도를 받은 김수경(1998년) 조용준(2002년) 이동학(2003년) 오주원(2004년)이 신인왕에 올랐다.

다만 감독으로서는 우승은 물론 포스트시즌 진출도 이뤄내지 못했다. 2007년 현대 감독을 시작으로 2009년부터 4년간 넥센을 이끌었지만 팀 전력이 워낙 좋지 않았다. 2013년 롯데 감독으로 부임한 뒤엔 두 시즌 만에 자진 사퇴했다.

하지만 감독 시절 선수 및 프런트 등과 원활히 소통하며 덕장(德將)으로 불렸던 그는 여전히 야구 현장에서 일하고 있다.

일본 연수 중이던 2015년 한국 야구대표팀의 전력분석팀을 맡아 초대 프리미어12 우승에 힘을 보탠 이후 한국야구위원회(KBO)에서 꾸준히 역할을 하고 있다. 2021년 도쿄 올림픽 기술위원장을 거쳐 현재는 경기운영위원장과 상벌위원, 규칙위원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서울 잠실구장에서 만난 김시진 KBO 경기운영위원장. 이헌재 기자

감독 출신들이 주로 맡는 KBO 경기운영위원은 경기 시작 직전까지 경기 진행 여부를 결정하는 게 가장 큰 일이다. 올해처럼 장마가 길고, 폭염까지 덮친 날씨에는 경기를 진행할지 말지 여부가 중요 관심사다.

그는 야구 경기 시작 2, 3시간 전에 일찍 야구장으로 출근해 그라운드 사정을 꼼꼼히 살핀다. 비 예보라도 있으면 신경이 온통 기상 예보에 집중된다. 그는 “경기 진행은 팬들과의 약속이다. 많은 분들이 오래 전부터 예약을 해서 야구장을 찾아주시기에 경기 진행 여부를 쉽게 결정할 수 없다”며 “선수들이 최선의 플레이로 보답할 수 있게 만반의 준비를 하는 게 우리 역할이다. 경기 개최 여부가 최종 결정되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먹지 못할 정도로 스트레스를 받기도 한다”고 말했다. 경기 개시 전까지는 경기운영위원이 개최 여부를 결정하고, 경기가 시작된 후에는 심판진이 중단이나 속행 여부를 판단한다.

김시진 KBO 경기운영위원장과 반려견 기고. 김시진 위원장 제공

지난해 초 김 위원장은 평생을 함께했던 아내 이선희 씨를 떠나 보낸 뒤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다. 건강했던 아내는 급성 혈액암으로 병원에 입원한 지 한 달 만에 세상을 떠났다. 이별을 준비할 시간도, 마지막을 함께 할 여유도 제대로 갖지 못했다.

그에게 큰 위안을 준 것은 아내와 함께 키운 반려견 ‘기고’였다. 그는 “아내가 세상을 떠난 뒤 강아지가 이틀간 밥을 먹지 않았다. 모든 걸 아는 것처럼 눈가에도 눈물이 고여 있었다”고 했다.

기고는 부부에게 뜻밖에 찾아온 선물이었다. 같은 아파트에 살던 이웃이 버리고 간 강아지를 관리사무소에서 맡아 줄 것을 요청하면서 부부가 키우게 됐다. 김 위원장은 “처음 우리 집에 왔을 땐 우리 얼굴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산책하러 가자고 해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며 “얼마나 기고만장하던지 이름도 ‘기고’라고 지었다. 지금은 기고 덕분에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했다.

김 위원장은 아침에 일어나며 기고와 함께 산책을 한 뒤 오전 시간을 함께 보낸다. 그리고 점심 식사를 한 뒤 야구장으로 출근한다. 그는 “기고는 반려견을 넘어 이제는 가족이나 마찬가지다. 집에 오면 반갑게 맞아주는 기고가 삶에 큰 위안”이라며 “기고가 아니었으면 오전 산책도 나가지 않았을 것 같다. 매일 나를 운동시켜 주는 고마운 존재”라고 말했다.

지금껏 야구장에 나가서 할 일 있다는 것 역시 또 다른 삶의 활력이다. 그는 “올해는 1000만 관중을 바라볼 정도로 많은 팬들이 야구장을 찾아주셨다. 팬들이 야구를 즐기는 모습을 보는 게 내게는 인생 최고의 즐거움”이라며 “야구를 하면서 좋은 일도, 힘든 일도 있었지만 그래도 많은분들의 사랑을 받는 행복한 인생이었다. 야구장에 남아 있는 동안은 조금이라도 더 팬들이 재미있게 관람할 수 있게 힘이 되고자 한다”고 말했다.

이헌재 기자 uni@donga.com

Copyright © 동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