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원 참사 미규명 진실] ④ 경찰, 수뇌부 방침 때문에 '안전유지업무' 회피했나
2022년 10월 29일 밤 10시 15분, 서울 이태원에서 압사 참사가 발생했다. 시민 158명이 거리 위에서 사망하고, 334명이 부상당했다. 참사 트라우마로 10대 생존자 1명도 목숨을 끊었다. 그로부터 약 1년 10개월이 흘렀다. 아직까지 이태원 참사가 '왜' 발생했는지는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다.
현재 이태원 참사의 원인은 파편적으로만 드러났다. 참사 직후 한 달여간 진행된 국회 국정조사는 참사의 일부분만 다뤘다. 일부 공무원에 대한 수사가 있었고 재판이 진행 중이지만, 책임자들의 '개인적·형사적 책임'을 입증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참사를 일으킨 여러 구조적 요인을 규명하기는 역부족이다.
지난 5월 2일, '10·29 이태원참사 피해자 권리보장과 진상규명 및 재발 방지를 위한 특별법'(이태원특별법)이 통과됐다. 이 법에 따라 곧 독립적 조사기구인 '특별조사위원회(특조위)'가 구성된다. 특조위는 이태원 참사와 관련된 각 기관의 관행과 책임, 구조적 한계, 시스템과 법령의 부재 등을 총체적으로 조사한다. 참사가 발생한 지 551일 만에야 이태원 참사 전반에 대한 진상규명 기회가 열린 것이다.
그렇다면 특조위가 반드시 조사해야 할 진상규명 과제들은 무엇일까. 뉴스타파와 독립언론 '코트워치'는 이태원 참사와 관련된 국회 국정조사 기록과 책임자들의 형사재판 기록, 별도 입수한 정부 문건 등을 분석해 특조위에서 반드시 다뤄야 할 진상규명 과제들을 추출했다. 그 과제들을 연재기사로 제시한다. <편집자 주>
[이태원 참사 미규명 진실]
① 그날 경찰은 왜 기동대를 배치하지 않았나
② 대통령실 이전은 경찰 대처에 어떤 영향을 미쳤나
③ 대통령실 이전은 용산구청에 어떤 영향을 미쳤나
④ 경찰, 수뇌부 방침 때문에 '안전유지업무' 회피했나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재난 주무 부처는 소방이지 경찰이 아닙니다. 인파관리, 혼잡경비도 중요하지만, 그 부분이 주라고 얘기하기는 (어렵습니다). 저희는 신고가 터지면 달려가서 범죄를 진압하고 해결하는 것이 일차적인 의무입니다."
- 김광호 전 서울경찰청장 / 2024.4.29. 이임재 등 용산경찰서 관계자 재판 증인신문
지난 4월 '이태원 참사' 재판에 증인으로 나온 김광호 전 서울경찰청장의 발언이다. 경찰의 일차적인 의무는 범죄 진압이지 인파관리가 아니라는 주장에 재판부는 경찰관 직무집행법을 언급했다.
재판장: 범죄 예방이 경찰의 주된 업무라고 해서 다시 물어보면, 경찰관 직무집행법 2조에 기본적으로 중요도 순서로 1호부터 7호까지 나오는데, 1호가 뭔지 아십니까?
김광호 전 서울경찰청장: 국민의 생명, 신체...
재판장: '국민의 생명·신체 및 재산 보호'가 1호고, '범죄 예방·진압 및 수사'는 2호로 되어 있는데, 국민의 생명·신체 보호가 더 중요한 것 아닌가요?
김광호 전 서울경찰청장: 그 부분을 도외시한다고 말씀드린 건 아닙니다. 생명·신체 보호는 굉장히 추상적인 임무로 돼 있고...
- 2024.4.29. 이임재 등 용산경찰서 관계자 재판 증인신문
이태원 참사 당일 시민들은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많이 경찰을 찾았다. 이태원의 혼잡한 인파를 관리해 주길 경찰에 요청했다. 하지만 김 전 서울청장의 인식은 달랐다. 혼잡경비 등 안전 유지 업무는 경찰의 주요 업무가 아니라고 여겼다. 이는 김 전 청장만의 인식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그렇지 않다.
'이태원 참사' 이후 수사와·재판 과정에서 드러난 주요 사실 중 하나는 참사 전, 경찰 조직이 '시민 안전'과 관련된 업무 범위를 축소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인파 관리에 기동대를 파견하지 말라는 내부 방침을 세웠고, 실제로 참사 당시 기동대를 파견하지 않았다.
참사 이후에도 경찰은 반성보다는 자신들의 안전 유지 업무가 강화될까 걱정하는 모습을 보였다. 경찰은 왜 '안전 유지'와 관련된 자신들의 업무를 축소하려고 했을까. 이런 경찰의 움직임과 이태원 참사는 어떤 관련성이 있을까.
'경찰 만능주의 극복' 기조에 밀려난 질서 유지 업무
2022년 8월 10일 윤희근 전 경찰청장이 취임했다. 윤 청장은 취임사에서 '경찰 만능주의 극복'이라는 새로운 목표를 제시했다. 경찰의 업무 부담을 덜어주겠다는 취지였다. 당시는 경찰국 신설에 따른 업무 과중에 대한 우려가 강하게 나오던 때였다.
윤 청장은 같은 달 31일 경찰 내부망에도 '경찰이 만능이 아님을 인정할 때, 경찰이 정말 경찰다워집니다'라는 제목의 글을 올렸다. 이 글에서 윤 청장은 "경찰은 조금이라도 '국민 안전'과 관련이 있다면 일을 마다해서는 안 되는 것으로 여겨"지지만, "경찰이 본연의 일에 더욱 전념할 수 있게 현장의 비효율을 바로잡겠다"고 썼다.
같은 해 10월, 경찰 만능주의 해결을 위한 구체적 방안이 제시됐다. 경찰청이 내부 워크숍 등을 통해 선정한 '경찰 만능주의 극복 과제' 15개가 그것이다. 이 중에는 '축제·마라톤 등 지역행사 경찰력 동원 개선'도 있었다. 지역 축제에 동원되는 경찰력을 줄이겠다는 의미였다.
"혼잡경비에 기동대 지원하지 말라고"... 서울청의 '방침'
김광호 당시 서울청장은 새 경찰청장의 행보에 발을 맞췄던 것으로 보인다. 이태원 참사 재판에서 일부 공개된 서울청 실무자 간 통화 녹취록을 보면, '안전 유지' 업무에 대한 당시 서울청의 분위기를 알 수 있다.
녹취록에 따르면, 참사 사흘 전인 2022년 10월 26일 서울청 112상황실 관계자는 용산서의 경력 지원 요청이 담긴 핼러윈 대책 문건을 확인한 뒤 서울청 경비부에 연락해 경비기동대 지원이 가능한지 문의했다. 서울청 경비부의 주요 업무 중 하나는 다중인파 관리 및 혼잡경비다. 서울청 관내 경비기동대 운용도 총괄한다.
그런데 당시 해당 서울청 112상황실 관계자는 용산서의 요청을 잘못 전달했다. 애초에 용산서가 서울청에 요청한 것은 '교통기동대' 배치였기 때문이다. 교통기동대는 집회·시위, 다중인파상황 등에서 교통 통제 등을 하고, 경비기동대는 직접적인 인파 관리를 맡는다. 담당 부서도 각각 교통부서, 경비부서로 다르다.
따라서 112상황실 관계자가 연락해야 했던 곳은 서울청 경비부가 아니라 교통부였다. 하지만 해당 관계자는 교통기동대와 경비기동대가 같다고 착각했고, 경비부에 연락해 '기동대 1개 제대' 배치 가능 여부를 물었다. 번지수를 잘못 찾은 셈이다.
서울청 경비부 측은 당연히 '경비기동대 1개 제대' 배치 요청이 들어온 것으로 받아들였다. 문제는 다음이다. 서울청 경비부 측은 '부서 차원에서 행사에 기동대 지원하지 말라고 방침이 서 있다'고 답한다. 아래 대화는 기동대 배치를 요청했던 서울청 112상황실 관계자(○으로 표시)와 서울청 경비부 관계자(●으로 표시) 사이 실제 대화 내용이다.
○ (용산경찰서에서) 기동대 1개 제대 이렇게 얘기하던데요.
● 기동대 1개 제대를 요청한다고?
○ 네. (용산경찰서 112상황실이) 핼러윈 혼잡경비 차원에서 요청하더라고요. 그 얘기 들으신 건 없는 거예요?
● 어.
(중략)
○ 만약에 요청을 하면 혹시 가능하신가 싶어 가지고.
● 경력이 지원이 가능한데, 우리 부장님(경비부장)이 혼잡경비에 기동대 지원하지 말라고 방침이 서 계셔서 모르겠네.
(중략)
● 우리 부장님이 '혼잡경비, 그런 행사엔 기동대 지원하지 마라'(고 하셨어).
○ 네.
● 큰 틀에서의... 마라톤 이런 것도 다 안 나가고 그랬거든.
- 2022.10.26 서울청 112상황실 통화 녹취록 / 2024.4.1. 이임재 등 용산경찰서 관계자 재판 중 제시
이 녹취록은 참사 직전 서울청 경비부 차원에서 경비기동대를 혼잡경비, 즉 지역 내 다중운집행사의 안전 유지 업무에 투입하지 않으려는 기조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서울청의 기조를 엿볼 수 있는 사례는 더 있다. 용산서는 참사 2주 전인 10월 15일~16일 이태원에서 열린 지구촌축제 때도 경비기동대를 요청했지만 지원받지 못했다. 서울청이 거부했기 때문이다. 용산서 관계자들은 지구촌 축제에 대한 서울청의 경비기동대 배치 거부 의사를 확인한 뒤 핼러윈에는 교통기동대만 요청했다고 말했다.
정 모 당시 용산서 112상황실 운영지원팀장은 "(지구촌 축제 때 기동대를 받지 못해) 저와 송 실장(당시 112상황실장), 이태원파출소 직원들이 기동대가 하는 역할을 보충했다. 핼러윈 때도 경력을 받지 못하면 저희로서는 매우 난관에 빠질 수 있기 때문에 최소한 교통기동대라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고 지난해 5월 용산서 관계자 재판에서 증언했다.
송 모 당시 용산서 112상황실장도 "지구촌축제 때 경비과에서 대책을 수립했다. 이와 관련해 '서울청에 (기동대를) 요청했지만, 배치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번에도 쉽지 않을 것'이라고 경비과장이 말하는 것을 들었다"고 수사기관에 진술했다.
결국 '경찰 만능주의를 극복해야 한다'는 윤희근 당시 경찰청장의 기조는 '혼잡 경비에는 기동대를 가급적 지원하지 않는다'는 실무 방침으로 이어졌고, 그런 방침 때문에 용산서는 이태원 참사 2주 전에도 경비기동대를 지원받지 못했다. 그리고 이태원 참사 당일에는 아예 경비기동대 지원을 요청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 결과 이태원 참사 당일 서울청은 집회·시위 현장에만 경비기동대를 배치했고, 이태원 핼러윈 축제 현장에는 인파 관리 목적의 경찰력을 전혀 보내지 않았다. 주최자가 있는 행사였던 홍대 핼러윈 축제도 마찬가지였다.
서울청 정보부장, 참사 후에도 경찰 안전 유지 '책임 축소'에만 관심
경찰의 안전 유지 책임 축소 기조는 참사 후에도 계속됐다. 박성민 전 서울청 공공안녕정보외사부장(정보부장)이 경찰 내부에 보낸 메시지를 보면 알 수 있다.
박 전 부장은 '서울시 내 공공안녕에 대한 위험의 예방과 대응을 위한 정보활동'을 총괄했다. 이태원 참사 이후 핼러윈 인파 위험이 언급된 용산서의 '정보보고서'를 삭제하라고 지시한 혐의로 기소돼 지난 2월, 1심에서 징역 1년 6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현재 항소심 중이다. 그는 서울청의 또 다른 핼러윈 관련 자료를 삭제하라고 지시한 혐의로 지난 1월 추가 기소됐다.
박 전 부장은 참사 바로 다음 날인 2022년 10월 30일, 경찰청 관계자들에게 카카오톡 메시지를 보냈다. 메시지에 따르면, 박 전 부장은 참사가 발생하고 만 하루도 되지 않은 시점부터 경찰에 '유리한 방향'을 고민했다.
개인 생각인데, 혹시 사고 책임에 대한 검토가 필요한 경우 참고하면 좋겠네. 사고 책임 관련 검토.
- 경찰이 경력 배치 미흡했기 때문이라는 시각으로 흐를 경우 → (중략) 앞으로 지역 행사, 축제 등에 더 많은 경력 배치 문제로 연결되어 수익자 부담원칙, 경찰 만능주의 극복에 악영향.
- 주최 측, 자치단체의 안전불감증으로 귀책될 경우 → 주최 측, 자치단체 책임 강화로 이어져 경찰 부담 완화. 적극적인 수사 드라이브로 주최 측, 자치단체 책임이 부각되도록 조치 필요.
- 박성민 전 서울청 정보부장이 경찰청 치안정보국 관계자에게 보낸 메시지 / 2022.10.30. 오후 1시 39분경
위 메시지 내용과 관련해 박 전 부장은 지난해 10월 23일 공판에서 "경찰이 자꾸 지역 축제 같은 일반 국민들의 행사에 관여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는 생각에서 메시지를 보냈다", "어떤 사고가 터지면 경찰을 더 많이 배치하고, '경찰 만능주의'로 흐르는 부분이 있었는데 그건 근본적인 대책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라고 증언했다.
다른 메시지 내용도 있다. 참사 이틀 뒤인 2022년 10월 31일, 박 전 부장은 경찰청 관계자들에게 보낸 카카오톡 메시지에서 '지역 축제에서 경찰이 안전 유지를 담당하는 관행을 깨야 한다'고 말했다.
"경찰은 안전 확보의 1차 책임자가 아니다. 앞으로 '경찰의 경비원화'를 막는 좋은 논리니까 지역 축제, 행사에 경찰이 안전 유지의 일부분을 담당하는 관행을 깨고, 범죄와 국민의 생명·신체·재산에 위험이 있을 때만 경찰이 압도적 강제력으로 장악하는 방향으로 나가면 좋겠다."
- 박성민 전 서울청 정보부장이 경찰청 경비국 관계자들에게 보낸 메시지 / 2022.10.31. 오전 10시 46분경)
또 이날 오후, 경찰청 경비국의 한 관계자는 박 전 부장에게 한 기사(대통령실, '이상민 발언' 논란에 "경찰 권한으로 선제 대응 어렵단 취지" / 2022.10.31 뉴스1)의 링크를 보냈다. "공직(대통령실 공직기강비서실)과 장관실(행안부장관)에 전달한 결과다. 불똥은 면하겠다ㅎㅎㅎ"라고 메시지를 썼다.
이 기사에는 "현재 경찰은 집회·시위 같은 상황이 아니면 일반 국민을 통제할 법적, 제도적 권한이 없다. 현재 경찰에 부여된 권한이나 제도로는 이태원 사고 같은 것을 예방하고 선제적으로 대응하기 어렵다"는 대통령실 관계자 발언이 있었다. 즉, 경찰청에서 대통령실과 행정안전부에 '경찰의 안전 유지 책임 및 권한이 크지 않다'는 취지의 내용을 전달했고, 이 내용이 곧 대통령실 관계자발로 기사화됐다는 의미였다.
경비국 관계자에게 기사를 전달받은 박 전 정보부장은 "스탠스(입장) 좋다"고 말했다. 기사에서 대통령실 관계자가 "주최자가 없는 행사의 경우 법적, 제도적으로 권한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보완해 나갈 것"이라고 발언한 것에 대해서는 "(경찰의 책임이 확대될까) 찜찜하다"고 했다.
"끝부분 앞으로 보완하겠다는 내용이 찜찜하네. 축제·행사의 안전 유지 책임을 경찰에 맡기는 입법이 이루어질까 봐. (경찰관 직무집행법) 5조 해석상 일반적·추상적 위험에는 개입하지 않는다는 스탠스 좋네. 수고해."
- 박성민 전 서울청 정보부장이 경찰청 경비게 보낸 메시지(2022.10.31. 오후 5시 39분경)
박 전 부장에게 실형을 선고한 1심 재판부는 "(박 전 부장이) 심지어는 비극적이고 불행한 사고의 발생을 기회로 삼아 경찰 조직의 업무 범위를 사고 이전보다 유리한 방향으로 조성하는 데 주안점을 두는 모습까지 보였다"라고 판시했다.
경찰은 왜 '국민 요구'와 멀어지게 됐나
김광호 전 서울청장 측은 지난 3월 열린 본인 재판의 공판준비기일에서 무죄를 주장하며 '경찰의 역할'에 대한 의견을 밝혔다.
"크리스마스이브나 여름철 해변에도 대규모 경찰력을 투입해 통제해야 한다는 건데 이는 터무니 없는 주장이다. 사람이 많이 나온다고 해서 경찰을 투입해 통제해야 한다는 발상은 '경찰국가적 발상'으로 민주주의 국가에서 요청되는 경찰의 역할과 맞지 않다."
- 김광호 전 서울경찰청장의 변호인 / 2024.3.11. 공판준비기일
김진호 전 용산서 공공안녕정보외사과장도 핼러윈을 크리스마스에 비유했다. 그는 참사 사흘 전인 2022년 10월 26일 이태원 담당 정보관에게 "이건(핼러윈) 주체(주최)도 없고, 그냥 크리스마스 같은 거다. 누가 크리스마스 때 정보관(정보활동을 하는 경찰관)이 나가나"라고 말했다. 정보관의 주요 업무 중 하나는 담당 지역 내 범죄 첩보, 위험 요인 등을 수집하는 것이다.
압사 위험도 측면에서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는 핼러윈 이태원의 좁은 골목과 넓은 해변을 동일 선상에 놓는 오류 등이 있긴 하지만, 앞선 두 경찰의 주장은 '경찰의 역할'에 대한 한 가지 의문을 제기한다. '사람이 많이 모인다는 이유'로 경찰력을 투입하는 것이 정말 과도한 것일까.
경찰청이 2015년 용역을 맡겨 진행한 '다중운집 행사 안전관리를 위한 경찰 개입 수준에 관한 연구'에는 이런 문구가 있다. "행사의 유형과 주체에 관계없이 위험성의 판단과 관리 및 감독을 담당하는 것은 안전 전문가인 경찰의 임무이며, 국민들이 경찰에게 요구하는 것이다." 지역 내 안전 유지는 경찰에 요구되는 '상식 수준의 책임'이라는 의미다.
이태원 참사 재판부도 상식과 거리가 먼 경찰의 인식을 지적했다. 지난 4월 용산서 관계자들의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한 김광호 전 청장에게 재판부는 참사 당일 집회 현장에 경찰력을 투입한 이유를 물었다.
재판장: ('이태원 참사' 당일) 집회·시위에 그 많은 경찰관들은 어떤 목적으로 나간 건가요?
김광호 전 서울경찰청장: 집회가 대로변에서 있었습니다. 집회 대오가 깨져서 (사람들이 차도로) 나오면 사고가 발생할 수 있어서...
재판장: 지금 말씀하신 것처럼 사고에 대비하려고 나간 게 아닌가요. 이태원에 대해 대규모 압사 사고 예상은 어려웠을지 몰라도, 사람들이 모이면 안전사고가 발생한다는 건 상식적인 것 아닌가요? 최소한의 대비는 했어야 하지 않나요, 경비부가 마련한 대책 있었나요?
김광호 전 서울경찰청장: 따로 없었습니다.
- 2024.4.29. 이임재 등 용산경찰서 관계자 재판 증인신문
김 전 청장의 답변에 재판부는 지적을 거듭했다.
재판장: 핼러윈 축제 당시 이태원에 인파가 많이 몰렸는데, 대책은 범죄 예방밖에 없었나요?
김광호 전 서울경찰청장: 일반인 인식은 그럴 수 있습니다. (행사가 있더라도) 시간대가 특정되지 않는 경우에는 인원이 많다고 해도 기동대가 배치되지 않습니다. 일부 경찰관이 안내를 위해 갈 뿐입니다.
(중략)
재판장: 사람들이 많이 모인다면, 시민 입장에서 생각할 때는 범죄 발생보다는 사고 발생 가능성이 높지 않나요?
김광호 전 서울경찰청장: 사고 이전에 만약 이태원에서 경찰관들이 시민들을 제지했다면 그 사람들이 무슨 근거로 막느냐고 했을 것입니다.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이 있을 때만 막을 수 있는 근거가 있습니다. 가깝고 현존하는 위험이 없으면 통행을 막을 수 있는 요건이 안 됩니다.
재판장: 사고 발생 직전 (이태원 현장) 동영상을 봤으면 그렇게 말씀 못하실 겁니다. 그러면 이전에 사고가 발생했어야 꼭 사고를 막을 수 있는 겁니까?
김광호 전 서울경찰청장: 그것도 체크할 수 있어야... 예지력이 있어서 예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 2024.4.29. 이임재 등 용산경찰서 관계자 재판 증인신문
이태원 참사 이후 발간된 2023년 경찰백서에는 이런 내용이 담겼다.
"'경찰 만능주의 극복'은 단순히 경찰이 범죄와 직접 관련된 업무만 하고, 다른 일에는 일절 관여하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다", "국민의 생명·재산의 보호와 관련이 있다면 '구체적 위험의 방지'와 '질서유지'도 명백하게 경찰 본연의 역할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 2023년 경찰백서 174쪽
"'경찰 만능주의 극복'은 경찰의 직접적인 소관 사무가 아니라는 이유로 국민 안전의 사각지대를 마냥 방치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기본 전제로 삼아야 한다."
- 2023년 경찰백서 174쪽
하지만 2022년 이태원에서 경찰이 보여준 모습은 위 경찰백서의 내용과는 달랐다. 이태원에서 경찰력은 범죄와 직접 관련된 업무를 중심으로 투입됐고, 안전의 사각지대는 방치됐다.
그리고 김광호 서울청장 등 주요 경찰 관계자들은 여전히 재판 과정에서 안전 유지 업무는 경찰 본연의 업무가 아니라는 취지로 진술하고 있다. 경찰이 뒤늦게 백서를 통해 '경찰 만능주의 극복'의 의미를 바로잡았지만, 진정성이 의심되는 이유다.
특조위의 조사가 필요하다. 윤희근 전 경찰청장 취임 이후 '경찰 만능주의 타파' 기조가 강조되며 경찰이 안전 유지 업무를 회피 혹은 축소한 건 아닌지, 이러한 기조가 한정된 경찰력 운용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고, 이태원 참사에는 어떤 직간접적 영향을 끼쳤는지, 또 현재의 경찰은 안전 유지 업무를 경찰 본연의 업무로 인식하고 있는지 조사할 필요가 있다.
뉴스타파 홍주환 thehong@newstapa.org
뉴스타파 코트워치 courtwatch@c-watch.org
Copyright © 뉴스타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