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교사들은 감정 쓰레기통이 되어 가는가?

강균석 교사(따돌림사회연구모임) 2024. 9. 9. 0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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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이초 1년, 실패한 교권5법을 넘어] ④ 학교폭력 권한 잃을수록 교사는 허수아비가 된다

따돌림사회연구모임은 지난 20여 년간 '학생을 평화로운 사회의 주인공으로 길러내는 것'을 목표로 학교폭력, 생활지도, 교권, 학생 심리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해 연구 실천해 온 교사들의 모임입니다.

서이초 초등학교 교사 사망사건 1년. 이 사태를 단지 학부모 악성민원과 아동학대법이라는 좁은 프레임에 가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교실이 이미 해체 단계에 이른 결과라고 진단합니다. 공교육 멈춤을 넘어 공교육을 되살리기 위한 근본적 원인과 해법을 찾기 위해 '3개의 특별법'을 제안합니다. 또한 평화적 공화주의로의 프레임 전환을 위한 논쟁이 벌어지기를 기대합니다.

학교폭력 전담조사관 100일 평가

맨 처음 학교폭력 전담조사관 제도를 도입한 것은 '학교폭력을 경찰에게 맡기겠다'는 대통령 약속이 있었기 때문이다. 학교폭력도 폭력이고 폭력은 경찰의 역할이라는 단순 논리에서 시작되었다. 그래서 폭력은 수사전문가였던 퇴직 경찰이 맡도록 한다는 정책이 나온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들의 활동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올해 2월 학교폭력법 시행령을 개정하였다.

그러나 모집 인원의 70%만 모집되었고 그 중 퇴직 경찰은 전체 모집 인원의 37%밖에 되지 않았다. 나머지는 퇴직 교사, 민간 상담사 등이 차지했다. 그리고 채용인원의 37%라는 것이 학폭 조사의 37%를 퇴직 경찰이 맡고 있다는 뜻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필자는 중학교 학생부장으로 근무하고 있는데, 한 번도 퇴직 경찰이 배정된 적이 없다. 그렇게 보면 퇴직 경찰은 채용이 되긴 했지만 주로 고등학생 사안을 다루거나 채용이 되긴 했지만 상대적으로 적은 건수의 조사를 맡고 있을 거라 추측할 수 있다. 애당초 취지에 비춰보면 매우 무색해지는 대목이다.

얼마 전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에서 진행한 학교폭력 전담조사관 100일 평가 설문에서도 학교폭력 전담조사관 제도가 학교 현장에 도움이 되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에 '그렇지 않다'가 전체 응답자의 43%를 차지하고, '그렇다'가 37%를 차지했다.

제자리걸음 또는 퇴행

교사들은 전담조사관 제도에 대해 '별로 도움이 안 된다'고 응답했지만 그 속에는 '방해가 된다'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학폭전담조사관제 도입으로 업무가 줄었냐'는 질문에 과반인 53.2%가 '그렇지 않다'고 답했다. '줄었다'고 답한 교원은 28.5%였다. 또 '제도 도입으로 민원이 줄었느냐'는 질문에는 '그렇지 않다'는 응답이 56.8%였으며, '그렇다'는 응답은 22.0%에 그쳤다.

그러나 설문조사 결과 말미에 "학교폭력 전담조사관제도가 안착하기 위해 가장 보완돼야 할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라는 질문에 대해 '신고접수 및 초기 대응, 사안 조사, 종결까지 전담조사관이 전담하여 사안 처리'가 36.2%로 가장 많았다. 즉, 교사들의 의견은 현재는 제자리걸음이나 퇴행에 불과하지만 제도를 강화하여 아예 학교폭력 관련 권한 일체를 외부 전문가가 가져갔으면 하고 바라고 있는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뱉은 '학교폭력 경찰 이관'이라는 망령이 아직도 교사들 사이에 떠돌아다니고 있다.

권한이 있어야 존중이 따라와

교사들이 착각하는 게 있다. 권한을 받으면 책임이 따라오기 때문에 고통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어느 정도 맞는 말이다. 그러나 현 시대와는 맞지 않다. 현시대의 교사는 학교폭력 문제 앞에서 기계나 허수아비와 다를 바 없다. 교사들은 학교폭력 문제가 발생하면 학생부로 문제를 넘기고, 학생부는 교육청에게, 조사관에게 문제를 넘긴다. 그러면서 '나는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말을 주문처럼 외운다. 그러면 학교와 교사는 악성 민원과 소송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허수아비와 기계를 존중하는 사람은 없다. 함부로 발로 차고 막 대해도 된다고 생각한다.

당장 내 아이가 학교폭력을 당했는데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고 하는 교사를 앞에 두고 학부모의 눈이 돌변하며 악성 민원인으로 변하는 순간을 많이 목격했다. 교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하면 교사는 사실상 피해자의 보호를 포기한다는 선언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가해자 부모도 마찬가지다. 아무 권한이 없는 사람은 무섭지 않다. 학교에 쳐들어 오자마자 '당신의 눈빛, 태도, 말투부터 마음에 안 든다, 우리 애를 나쁘게 보고 편견을 가지고, 강압적으로 조사를 한 게 아니냐, 당신을 아동학대로 신고하겠다.'고 소리 지른다. 필자는 학생부장이라 어느 정도 격식을 갖춰서 행동했을 것을 고려하면, 담임교사에게는 어떻게 대했을지 짐작도 안 간다. 그 학부모의 드잡이를 멈추고 돌려세우는 데 반나절이 걸렸다.

교사의 권한은 훈육에서 나와

그러나 교사가 학교폭력 조사권과 훈육권을 가지고 있다면 어떨까. 교사를 함부로 대할 수 없을 것이다. 교사의 조사와 훈육이 자녀에 대한 처우에 영향을 미칠 것이기 때문이다. 냉정하게 말해 권한이 있는 존재가 존중받는 것이다. 우리가 경찰의 수사를 신뢰하고, 판사의 선고 앞에 고개를 숙이는 것은 그 권한 때문이다. 그 권한은 법에서 나온다.

왜 미국의 학부모들은 교사에게 깍듯할까. 교사에게 아이들의 평가권 및 징계권이 있기 때문이다. 학교에 와서 행패를 부리다가는 자기 자녀가 그 학교를 못 다니게 되기 때문이다.

물론 미국인들은 소송을 밥 먹듯이 한다. 하지만 적어도 미국의 법은 권한 정비가 잘 되어 있다. 미국은 법적으로 징계권이 교육감에 있고, 교육감이 그 권한을 학교에, 학교가 그 권한을 교사에게 이양하는 형태다. 따라서 학교와 교사의 징계는 법적 효력이 있고, 학부모가 불복하려면 교육청을 상대로 소송을 걸어야 한다. 그리고 그 불복 소송의 책임은 최소 교감 이상이 처리하게 되어 있다.

이것은 우리나라에서도 지금 당장이라도 할 수 있다. 전학 및 퇴학은 교육청이, 출석정지에서 사회봉사까지는 학교장이, 교내 봉사부터 교육 벌까지는 담임교사가 하도록 하고 그 징계권의 원천을 교육감에게 있다고 하면 깔끔하게 정리된다. 불복 소송의 주체가 교육청이 되고 관리자들이 그 과정을 책임지면 된다. 우리나라 법률가들이나 정책 입안자들이 이런 사실을 과연 모를까. 근본적인 대책이 무엇인지 알고, 의지만 가지면 시행할 수 있지만 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교사들이 힘을 합쳐 권한을 받아내야 한다.

교사 죽음의 원인은 폭력을 막을 수 없는 절망 때문

서이초의 교사, 호원초의 김은지, 이영승 교사를 절망으로 몰아간 것은 단지 학부모의 악성 민원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김은지 선생님은 발령 한 달 만에 우울증 진단을 받았습니다.
[고 김은지 부모]
"학생들이 서로 뺨 때리면서 막 치고받고 싸우는 걸 보고 애가 충격을 먹어서... 그 뒤로 집에 와서 자기 침대에 앉아서 계속 '그러면 안 돼. 그러면 안 돼.'"
사직서를 냈지만 학교는 만류했고, 담임 대신 음악 전담 교사로 발령했습니다.
- 의정부 호원초 고 김은지 부모 인터뷰 중

서이초의 젊은 무명 교사는 아이들을 잘 가르치려는 열정이 가득한 교사였다. 호원초의 젊은 교사 김은지, 이영승 교사 역시 그랬다. 서이초 교사 추모 집회에서 무대에 올랐던 모든 교사들의 발언은 같았다.

'아이들을 잘 가르치려던 내가 아동학대 교사로 몰렸다.'
'헬렌켈러가 우리 나라에 온다면 아동학대범으로 몰렸을 것이다.'
'아이들에게 폭력을 휘두르던 아이를 그저 몸으로 막는 수밖에 없었다.'
'공포에 사로잡힌 학급 아이들의 눈을 보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 자신에 대해 절망감에 사로잡혔다.'

교사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은 단지 몇몇 학부모의 악성 민원 때문만이 아닐 것이다. 폭력으로 가득한 교실 앞에서 교사로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절망감이 더욱 교사들을 고통으로 몰아 넣었을 것이다. 교사로서 그 존재를 부정당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왜 교사들은 감정 쓰레기통이 되어 가는가

단적으로 말해 교사에게 교실의 폭력을 막아낼 수 있는 권한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사 자신이 희생자가 되고 있는 것이다. 특히 학교폭력 문제에 있어 교사의 권한이 없기 때문이다. 잘못한 아이를 나무랄 수도 없고, 피해 학생을 보호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이라면 교사들은 교실 안의 허수아비로, 양쪽의 감정을 받아내는 감정노동만 계속할 것이다. 아니 이것은 감정노동도 아닌 감정의 노예, 감정 쓰레기통 노릇인 것이다.

애초에 학부모 민원은 두 가지라고 생각한다. 가해자가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뻔뻔스럽게 나오거나 피해자가 '학교가 자신을 보호해 주지 못했다'고 생각하며 학교를 공격할 때다. 학교가 이와 같은 고통을 겪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교사에게 가해자를 훈육할 수 있는 권한과 피해자를 보호할 수 있는 법적 권한이 있어야 한다.

소위 악성 민원 학부모들은 왜 학교에 쳐들어와 진상을 부릴까. 내가 학교에 가서 진상을 부리고 학교를 갈아 엎어야 우리 애한테 유리하게 돌아갈 것이라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또는 내가 학교 가서 진상을 부려야만 학교가 우리 애를 보호해 줄 거라 오해하기 때문이다. 이 둘은 비슷하다. 교사를 아무 권한 없는 허수아비나 기계로 보는 것이다. 어떠한 권한도 없는 허수아비에게 누가 존중과 예의를 보이겠는가. 강하게 들이 받아서 원하는 것을 얻어내야 하는 것이다. 교사들은 권한 없는 서비스직에 불과하기 때문에 강하게 나갈수록 우리 아이에게 유리하게 돌아간다고 보는 것이다.

법적 권한이 악성 민원을 막을 수 있어

교사가 학생을 혼낸 것이 아동학대가 아니라는 것을 어떻게 입증할까. 교사에게 가해학생에 대한 훈육권이 있다는 것을 법에 명시하면 된다.

교사가 피해 학생을 보호해 줄 수 있다는 것을 어떻게 학부모에게 확신시킬까. 교사들에게 가해 학생을 피해 학생으로부터 격리하고 보호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는 것을 법에 명시하면 된다. 교사가 가해자를 훈육하는 것이 피해자를 보호하는 길이므로 이 둘은 같은 얘기가 된다.

악성 민원을 하는 학부모에 대한 대응도 마찬가지다. 마치 의료법에 의사들의 의료행위 방해를 엄벌에 처한다고 했듯이, 교사들의 교육행위 방해 역시 엄벌에 처한다고 법에 명시하면 된다.

교사들의 역할을 '학교폭력 피해자 보호'로 명시하면 쓸데없는 기계적 중립 논란을 피해갈 수 있고 피해 학생과 학부모를 안심시킬 수 있다. '교사들은 학교폭력 피해자를 보호하는 사람들이다, 마음이 힘든 건 이해하지만 이렇게 교육 활동을 방해하면 교사들이 자녀를 보호해 줄 수 없다, 믿고 맡겨 달라.'고 설명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교사에게 법적인 권한으로서의 훈육권이 있어야 악성 민원이 줄어든다. 그래야 불복 소송의 주체가 상급 단위인 교육청이 되고 교사들은 당당하게 교육활동에 임할 수 있을 것이다.

학교폭력 피해자 보호법을 특별법으로

따라서 현재의 학교폭력법을 폐지 후 재입법하거나 대대적으로 뜯어고쳐 '학교폭력 피해자 보호법'을 만들 것을 제안한다. 교사의 역할을 '학교폭력 피해자 보호'로 놓아 불필요한 논쟁을 없애고, 담임교사, 학교장, 교육청 그리고 경찰이 학교폭력 문제에 대한 권한을 나누어야 한다. 특히 담임교사가 학급 안에서 일어나는, 경미한 학폭에 대한 조사, 피해자 보호, 훈육에 대한 모든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법에 명시해야 한다. 대부분의 학교폭력이 학급 안에서 일어나는 경미한 사안이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말해 학급 생활이 평화롭다면 대부분의 학폭 문제는 해결되는 것이다. 그 역할을 담임교사에게 주고 업무는 줄여주고 필요하면 교사를 더 채용해야 할 것이다. 대한민국은 인구 소멸 위기 국가다. 학교폭력 문제 잡지 못하면 대한민국 교육에는 미래가 없다.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니다.

경미한 학폭, 중대한 학폭, 심각한 학폭에 대해 담임교사, 학교장, 교육청의 권한을 명시한 법을 만들어야 하며 다른 법과의 충돌을 막기 위해 이를 특별법으로 정해야 한다. 왜냐하면 아동학대법, 학습권 침해, 특수교육법, 학생인권조례와의 충돌을 피해야 하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는 법치국가를 넘어 법화 사회라 부를 만큼 법이 모든 사람들의 인식과 문화를 규정하고 있다. 교사들 역시 법의 문제를 피해갈 수 없다. 따라서 교사들은 꾸준히 법의 모순과 위선을 밝히고 진정한 교육을 위한 법, 평화로운 학교를 위한 법을 끊임없이 요구해야 한다.

▲ 지난 7월 20일 오후 서초구 서울교육대학교 대운동장에서 열린 초등교사노동조합 주최 서이초등학교 교사 사망 1주기 추모행사에서 참석자가 추모 메시지를 적고 있다. ⓒ연합뉴스

[강균석 교사(따돌림사회연구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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