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년 경력단절을 넘어서 [6411의 목소리]

한겨레 2024. 9. 9.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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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장에는 일반 약들이 종류별로 정리되어 있는데, 빠진 약들을 파트타임 직원이 중간중간 채워두어 판매를 원활하게 돕는다. 필자 제공

서윤경 | 약국 파트타임 직원

결혼하고 20년 넘게 전업주부로 살았던 나는 두 아이를 키우며 호시탐탐 사회로 나갈 궁리를 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이런저런 일로 사회에 나갈 방도는 생기지 않았고 어느덧 쉰을 넘긴 나이가 됐다. 그렇다고 집에만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누군가의 아내, 아이들의 엄마로 살아온 25년이었다. 이제부터는 내 이름으로 활동하는 주체적인 삶을 살고 싶었다. 20대 때의 회사 경력이 단절된 나는 사회에 다시 나가는 게 무척이나 어렵게 느껴졌다. 내 성격과 적성에 맞는 일을 찾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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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고 싶었던 약국에 아르바이트 지원을 했다. 감사하게도 면접의 기회가 주어졌고 면접이 끝나갈 무렵 언제부터 출근할 수 있냐는 말을 듣고 가슴이 뛰었다. 일을 해도 티가 나지 않는 집안일과 달리 약국에서의 일은 또 다른 즐거움과 보람이 있었다. 집안일을 어느 정도 해놓고 오후에 파트타임으로 출근할 곳이 있다는 게 좋았다.

나는 주 5회 하루 네시간 정도 약국에서 일한다. 약국에는 약을 짓고 복약 지도하는 약사님들, 약이 떨어지지 않게 물량을 주문하고 재고를 관리하며 약국 살림을 담당하는 풀타임 직원분들, 그리고 약사님들의 일을 보조하는 파트타임 직원분들이 있다. 파트타임 일을 흔히 약국 알바라고 말한다.

내게 처음 맡겨진 일은 시럽이었다. 처방 스티커가 나오면 투약 병에 스티커를 붙이고 해당 시럽을 용량에 맞게 따르는 일이었다. 이제는 시럽뿐만 아니라 처방전 입력, 일반 약 판매와 결제, 약장 채우기, 약 포장지 준비 등 내가 하는 일이 늘었다. 일이 익숙해진 덕분인지 눈앞에 일이 보이면 바로 처리할 수 있게 됐다. 처음에는 잘 몰랐던 많은 약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새로운 약이 들어오면 약 이름과 기본 효능 정도는 알아두려고 한다. 약은 처방전에 나온 대로 정확하게 나가는 게 중요하다. 다양한 약들을 챙겨야 하므로 꼼꼼하게 약의 위치나 이름 등을 미리미리 암기해놓으면 좋다.

재밌는 점은 약의 이름이 지어지는 방식이었다. 쓰임에 맞춰, 기억하게 좋게 약의 이름이 지어졌다. 약 이름을 잘 모를 때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손님이 ‘작감정’을 달라고 하셨는데, “네? 닭강정이요?”라고 되물어서 약국이 웃음바다가 됐다.

50여년 동안 소비자로서 약국을 드나들며 느꼈던 약국의 느낌은 평온하고 친절하며 물 흐르듯 편안해 보였다. 그러나 약국 보조로 일하며 조제실 안이 이렇게 바쁘고 할 일이 많은 곳이었는지 처음 알게 됐다. 힘든 점이라고 하면 역시나 쉴 틈 없이 밀려드는 처방전들이다. 바쁠 때는 화장실 가는 것도 잊고 물 마실 시간도 없이 모두가 눈코 뜰 새 없이 정신을 바짝 차리고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한건 한건 처리해 나간다. 약국 안을 가득 메우고 있던 손님들이 모두 약을 처방받아 가고 한두분 남았을 때가 돼야 겨우 숨을 돌린다.

우리 약국에는 총 아홉명이 일한다. 서로 돌아가며 출근 시간을 달리해 일하는데 20대부터 50대까지 다양한 연령대가 일하고 있다. 50대인 나는 젊은 분들과 함께 일하는 즐거움이 크다. 또 하나의 즐거움은 아기 손님들이다. 요새는 길을 가다가 유아차에 탄 아기들을 만나는 게 쉽지 않다. 같은 건물에 소아과 병원이 있는 약국이다 보니 아기 손님들이 많이 온다. 손을 흔들며 약국 안으로 들어오는 아기들을 보면 천연 비타민이 따로 없다.

약국에 있으면서 약국이란 곳이 생로병사를 가까이서 지켜볼 수 있는 곳이라는 걸 느꼈다. 오랫동안 근무한 약사님들은 오랜 단골손님 중에 어릴 적부터 다니던 아이들이 중고등학생이 되거나 군대에 가고, 어르신들은 하루가 다르게 나이 드심이 보이고 가끔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손님 가족들에게서 듣게 된다고 했다.

우리 약국은 참 바쁘지만, 친절하다. 약도 정말 빠르게 나온다. 근무자가 여유 있게 배치돼서이기도 하겠지만, 약국 분위기가 쾌활하고 태도는 친절하며 응대 또한 빠르다. 약국도 하나의 작은 사회다. 약을 준비하는 손이 정신없이 바쁜 날도 있지만, 함께 일하는 사람들의 존중과 배려, 협동이 있어 바쁜 날도 웃으며 일할 수 있다. 각자의 자리에서 맡은 일을 하되 자기 일이 아니어도 서로 도와가며 정확하고 신속하게 약이 나갈 수 있게 하는 흐름이 중요하다. 한마디로 손발이 맞으면 바쁜 날도 순조롭게 일이 진행된다. 이처럼 작은 이해가 큰 차이를 만든다.

※노회찬 재단과 한겨레신문사가 공동기획한 ‘6411의 목소리’에서는 일과 노동을 주제로 한 당신의 글을 기다립니다. 200자 원고지 12장 분량의 원고를 6411voice@gmail.com으로 보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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