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의 끝에서 로망을 외치다 [편집국장의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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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폰과 구글 드라이브에 사진 파일이 무한히 저장돼 있지만 여전히 출력된 가족사진을 지갑 속에 넣고 다닙니다.
전쟁이 나거나 큰 재난이 일어 전기가 끊기고 디지털이라는 것이 무용지물이 되는 디스토피아를, '잠들기 직전 쓸데없는 생각 타임'에 자주 떠올립니다.
불타버린 지구의 끝에서 서버니 클라우드니 그런 것들은 남아 있지 않아도 어딘가 타다 남은 〈시사IN〉 종이책 한 귀퉁이쯤은 발견되지 않겠나,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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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폰과 구글 드라이브에 사진 파일이 무한히 저장돼 있지만 여전히 출력된 가족사진을 지갑 속에 넣고 다닙니다. 전쟁이 나거나 큰 재난이 일어 전기가 끊기고 디지털이라는 것이 무용지물이 되는 디스토피아를, ‘잠들기 직전 쓸데없는 생각 타임’에 자주 떠올립니다. 그런 상황에서 혹시라도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는 악몽 같은 일을 겪었을 때 가족들 얼굴이 담긴 사진 한 장이 품에 없을까 봐 공포에 떱니다. 저는 물리적으로 실재하는 것의 가치를 믿는 편입니다.
“대한민국에서 종이 매체가 단 하나 살아남는다면 그것은 〈시사IN〉일 것이고, 또 〈시사IN〉이어야 한다.” 편집국장 후보 청문회 때 편집국 구성원들 앞에서 한 말입니다. 호기롭게 외쳤지만, 사실 인쇄물 속에 뉴스를 담는 일은 점점 더 고역이 되고 있습니다. 온라인 기사보다 지면 기사는 훨씬 더 독자들에게 늦게 가닿고, 제작하고 유통시키는 공정에 인력과 비용이 많이 들며, 틀리면 치명적입니다. 후다닥 쓰고 ‘전송’ 버튼만 누르면 바로 ‘발행’되는, 오류가 나도 ‘수정’ 버튼으로 간단히 고치면 흔적이 남지 않는 온라인 플랫폼에 더 투자하지 않고 〈시사IN〉은 왜 미련하고 답답하게 ‘쌓여서 짐만 되고’ ‘오류 나면 다음 호에 ‘바로잡습니다’를 낼 수밖에 없는’ 종이책을 유지할까요?
〈시사IN〉 기자들 각자 그 답이 다를 겁니다. 아예 그 전제에 동의하지 않을 구성원도 있겠고요. 다만 제 개인적 졸견을 밝히자면, ‘인류가 멸망했을 때를 대비해서’입니다. 좀 우습나요? 하지만 저는 진지하답니다. 위에서 말한 그 ‘망상 타임’ 때 저는 인류 멸망 후 새로운 문명의 존재가 고고학적 발굴을 하는 장면도 가끔 떠올립니다. 마치 우리가 옛 공룡 시대를 탐구하는 것처럼요. 불타버린 지구의 끝에서 서버니 클라우드니 그런 것들은 남아 있지 않아도 어딘가 타다 남은 〈시사IN〉 종이책 한 귀퉁이쯤은 발견되지 않겠나, 생각합니다. 거기 적힌 문자들로 대한민국과 인류 공동체의 역사를 유추해낼 수 있을 테고 그것을 통한 교훈이 새로 출발한 문명에 조금이나마 거름이 될 수 있을 거라는, 매우 디스토피아 같으면서 유토피아적인 상상도 합니다.
“사실 살아남을 것이라는 ‘예상’보다는 살아남아야 한다는 ‘당위’를 주장한 것에 가깝다.” 이번 호에 담긴 인터뷰 기사에서 손석희 전 JTBC 대표이사가 ‘미디어 환경이 달라지더라도 본래적 의미의 저널리즘은 살아 있을 거다’는 문장에 붙인 말입니다. 저 역시 ‘예상’보다는 ‘당위’로서 ‘〈시사IN〉 종이책 포에버(Forever)’를 외칩니다.
곧 추석이 다가옵니다. 반소매 아래 살에 스치는 선선한 바람, 집집마다 풍겨내는 기름 냄새, 오랜만에 만난 가족 친지의 웃는 낯과 같은 물리적 실체들을 한껏 만끽하며, 즐겁고 넉넉한 한가위 보내시길 바랍니다.
변진경 편집국장 alm242@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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