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들, 기후재앙·박근혜보다 윤석열에 더 좌절

임인택 기자 2024. 9. 9. 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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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현대시집 100년 ‘시인의 초상’ 2부 ③
창비·문지시인선 시인 80명 설문
‘21세기 시적·반시적 사건’ 3가지씩 묻자
세월호·전쟁·미투·이태원참사·팬데믹·윤석열 순
‘한국 현대 시집 100년’을 계기로 현역 시인들 80명에게 ‘21세기 들어 가장 시적·반시적(反詩的) 사건’ 3가지씩을 물은 결과, 세월호 참사, 세계 각지의 전쟁, 미투, 이태원 참사, 코로나 팬데믹, 윤석열 대통령 당선·정치 순으로 많이 꼽혔다. 위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2024년은 한국 최초의 창작시집인 김억의 ‘해파리의 노래’가 올해 101살, 최초의 자유시 ‘불놀이’를 담은 주요한의 첫 시집 ‘아름다운 새벽’은 100살, 근대문학사에서 대중 시집의 전범을 세운 김소월의 첫 시집 ‘진달래꽃’이 99살 되는 해다. 한국 시집 100년의 경계. 게다 지난 전반기는 창비 시선 500호, 문학과지성사 시인선 600호를 돌파하고, 김혜순 시인이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을 받은 기념비적 시기다. 이를 계기로 지난 상반기 한겨레가 창비 시선, 문학과지성사 시인선을 통해 시집을 출간한 적 있는 시인들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벌였다. 당신의 시인, 당신의 소설가, 당신의 자긍심과 안부는 물론 문학판의 공정성, 현 정부 출판 정책에 대한 평가, 21세기 반시적(反詩的) 사건 등 30여 가지를 물었다. 설문에 참여한 시인 80명은 20대 중반부터 70대 후반으로, 등단 시기가 1960년대부터 2021년까지 반세기를 넘나든다. 한국 문단사에 없던 방식과 규모의 설문조사로, 시인 여든과의 집단 인터뷰라 할 만하다. 2부(전체 5회)에 걸쳐 2024년 ‘시인의 초상’을 그린다. 편집자주

프랑스 시인이자 소설가인 쥘 베른의 1863년 작품 ‘20세기 파리’에서 시인이 된 주인공을 향해 친척들은 말한다. “우리 집안에 시인이 나오다니 수치다.” 맞춤형 작품을 “제작”하는 공무원 작가로 충분한 시대, 과학기술 발전과 물질주의로 예술, 특히 문학이 절멸하는 디스토피아의 풍경이었다. 쥘 베른보다 두 세대 뒤인 시인 토머스 스턴스(T.S.) 엘리엇은 “위대한 시인은 자기 자신을 쓰면서, 자기 시대를 쓴다”고 말했다. 일찍이 시대의 깃대종이자 풍향계가 시인인 셈이다. 실제 2007년 첫 시집을 낸 한 시인은 “시를 쓰는 것으로도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고, 세계에 참여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고 ‘시인이 되고자 한 이유’를 말했다. 한 전업 시인은 “시대 변혁을 위해 연대하고자” 등단(1988)을 목표했다. 2004년 등단 시인은 “세계의 불평등을 인식하고 변화시키고자 하는 갈망”으로 시인을 꿈꿨다.

윤 정부 문학출판 정책 “10점 중 2.2점”

이들이 지금 보는 ‘윤석열 시대’는 어떨까? 당대 시인들이 2023~24년 정부의 문학 출판 정책에 준 점수는 평균 2.23점(10점 만점)으로 조사됐다. ‘문예진흥·출판 지원 축소’가 가장 많은 이유로 지적됐다. 우수문학도서·동네책방 지원 사업 등의 정책 후퇴를 가리킨다. ‘인문학 경시 태도 및 청사진 부재’도 만만치 않았다. “작가들의 의견 피드백이 빠르게 반영되는 지원사업의 다양화·확대”라는 긍정 평가 내지 기존의 창작자 직접 지원 방식을 경계하는 의견도 있었으나 미미했다.

‘반시적 사건’ 첫손에 ‘세월호 참사’

대신 “문학이 펼쳐지는 현장에 물을 끊어버린 것”, “도서 출판 문화계에 대한 현 정부의 정책 계획과 시행은 매우 끔찍했다”, “(전 정부보다) 지원의 반 이상이 사라졌다” 따위 응답에서 보듯, 정책의 퇴행 수준보다 현장 효능감의 추락이 훨씬 커 보인다. 악화일로의 출판 생태계가 가중된 때문이다. 열에 여섯(51명, 63.8%)은 “최근 5년 시·소설 등 우리 문학계가 퇴보한 편이고, 안 좋은 영향을 미치는 요소가 많은 환경이었다”고 평가한다. 그 이유로 “스마트폰 등 온라인 보편화”가 최다 언급(29회, 복수응답)된 데 이어 “시장에 영합한 출판·문학 상업주의”(28회), “정부 정책 및 지원의 퇴보”(23회), “독자의 무관심과 외면”(17회), “문예창작 교육의 한계”(14회), “독자와 유리된 작가주의”(13회), “신진 작가의 배경 다양성 부족”(12회) 등이 뒤따랐다.

반대로 “지난 5년 문학계가 성장한 편”이라 본 시인들(33.8%)은 “다양한 배경의 신진 작가 등장”(16회), “독자의 기호 다양화”와 “국내 문학의 해외 수출 확대”(12회씩), “출판 기회의 증대”(8회), “작가주의 및 작품성 증대”와 “스마트폰 등을 통한 작품 접근성 제고”(7회씩) 등을 차례로 이유 삼았다.

시인 수입 “월 평균 36만원”이지만

이번 조사 응답자 중 지난해 기준, 14명이 자신을 전업 시인으로, 10명이 다른 글도 쓰는 전업 작가로 인식했다. 다만 여기서도 5명은 비정규직 업무나 자영업·농업을 병행했고, 3명은 단기계약직 내지 일용직도 했다고 밝혔다. 정규직이 24명, 비정규직 고정 업무를 해온 이는 20명이다. 전체 응답자 80명 중 10명이 단기계약직, 4명이 일용직을 경험 내지 시도했다. 이들이 밝힌바, 지난 한해 시(집)를 통한 수익(관련 강연 등 포함)은 평균 426만원이었다. 달에 35.5만원꼴이다. ‘시인 3만명’(추정)인 시대, 창비와 문학과지성사에서 시집을 출간한 시인은 그중 희소하다. 신인들의 염원을 이룬 시인들의 초상이 이러하다.

그럼에도 시는 ‘기적’이 되고

이런 처지가 시인으로서의 자긍심을 해치진 못한 듯하다. 10점 만점에 평균 7.55점 매겨진 대로다. 백석의 시처럼 외롭고 높고 쓸쓸하다. ‘시의 필요’만은 자명해서일까. ‘이 시대 시는 왜 (불)필요한가’ 물었다. 시인은 그 ‘쓸모’를 말했다. “고유한 언어를 보유한 국가”이기 때문이다. “시는 가장 예민한 모국어”이기 때문이다. “혐오와 갈등의 언어가 횡행하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실패의 목소리는 누구도 귀 기울이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 시가 사라지는 것은 여기 벌이 사라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굳이 “꽃의 이유와 필요는 묻지” 않는다.

“이 빠르고 편리한 시대, … 시가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다. 그렇지 소용없지. 그렇게 ‘소용없지’의 영역이 커진다. 시도, 소설도, 영화도, 산책도, 농담도, 안부도, 그걸 좋아하는 사람도, 빠르고 편리한 사회에 …‘소용없지’의 영역 안에…. 그러다 어느 날 ‘나’ 역시 들어가겠지. 그럴 때 무엇이 나를 소거하지 않고, 이곳의 나로 돌려줄까? 누군가의 안부와 농담, 조용한 산책과 영화, 소설 그리고 시.”

아니 애당초 ‘쓸모’란 건 뭔가. “문득문득 시가 나를 쓰고 있다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다.”(1988년 등단) “시는 필요하지도, 불필요하지도 않다. 그냥 있을 뿐이다.”(2021년 등단)

현대 시집의 대중화를 열었던 ‘오늘의 시인 총서’(민음사)가 출범한 지 이달 25일로 꼬박 50년을 맞는다. 1호가 바로 김수영의 시선집 ‘거대한 뿌리’였다. 자비 출판 아니면 첫 시집까지 10년 넘게 걸렸던, 신작 시집은 엄두도 내지 못했던 때 “변변한 시집도 펴내지 못하고 요절한 불운한 시인”(‘박맹호 자서전 책’)이 이룬 ‘시의 기적’. 시인도, 독자도 시는 결결이 기적인 걸 안다. <끝>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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