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렬의 ‘마력’… 참여자를 매혹시켜 순응자로 만든다[김영민의 본다는 것은]
임금 행차 등 권력자 행렬
예식의 힘에 사로잡히면… 구경꾼 마음에는 정화작용
질서에 저항하기보다는 순응… 행렬 일부로 동참 때 더 고양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들의 사랑이 다시 피어오른 것일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영화 곳곳에 배치된 상징을 성실하게 따라가야 하지만, 대답의 일부는 그들 사랑이 다시 피어난 현장에 있다. 그 남녀는 예상치 못하게 가톨릭 행렬에 휩싸였던 것이다. (로셀리니 감독은 실제 행렬에 배우들을 집어 넣어버렸다.) 사람들로 가득 찬 그 행렬의 한복판에서 두 남녀는 사랑의 약동을 다시 경험한다. 행렬을 구경하는 사람이 아니라 행렬의 일부가 되었을 때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일본도 마찬가지다. 도쿠가와 시대에 쇼군은 다이묘들을 이끌고 오늘날 온천관광지로 유명한 닛코의 동조궁을 자주 참배했고, 다이묘는 다이묘대로 무장행렬을 지어 에도까지 행진했다. 이러한 정치적 행렬은 무력을 과시하는 데 주안점이 있었고, 길 주위에 모여든 사람들은 납작 꿇어 엎드렸다. 한국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다. 19세기 말에 한국을 방문한 영국인 이저벨라 비숍은 한국에서 본 가장 진귀한 광경으로 임금의 행차를 거론했다. 비숍의 눈에는 그 행렬에 동원된 무력은 그다지 인상적이지 않았다. “왕을 기다리다가 지루해진 기병들은 담배를 피우며 땅바닥에 앉아 있다가 나팔 소리를 듣고서야 후다닥 안장 위로 올라갔다. 놀란 말들은 물어뜯고 차며 비명을 질렀다.”(‘한국과 그 이웃나라들’)
그러나 단조로운 일상을 살아가던 백성들에게 그 화려한 의례행사는 대단한 볼거리였음에 틀림없다. 그 점은 조선 후기 문인 윤기(尹愭)의 글에서도 확인된다. “희한한 것이 있다고 하면 그게 아무리 작은 것이어도 반드시 쫓아가서 보고, 별난 일이 있다고 하면 그게 아무리 외진 곳의 일이라고 해도 반드시 쫓아가서 살펴본다. 눈 달린 이라면 볼거리가 있기만 하면 고개 숙이고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이런 것 중에 가장 심한 경우가 바로 임금이 행차할 때다”(凡有目者苟有可以見, 則未有低頭而過者也. 如是矣, 而最是動駕之時).
이는 구경꾼에 불과한 비숍의 상상이었을 뿐, 비숍보다 앞서 임금의 행차를 여러 차례 목격한 윤기는 조선 후기 임금의 행차에 대해 다르게 기록했다. “창문과 문틈으로 훔쳐보느라 얼굴이 드러난다. 길가의 곁눈질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점잖을 빼지 않는다. 노비들이 궁시렁거려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염치와 체모를 모두 내팽개친다”(從窓而瞰, 由隙而闚, 露出面貌, 不顧道路之睨視, 喪失容儀, 不避皁隷之指點. 凡係廉恥體貌, 並皆放倒). 즉, 양반들마저 진귀한 눈요깃거리에 흥분했고, 노비들은 그런 양반들을 비웃었던 것이다.
이처럼 행렬의 현장에서는 많은 일이 벌어진다. 권력자는 권력을 과시하고, 호사가는 눈요기를 하고, 피치자는 권력자를 비판하고, 동네 깡패들은 그 틈을 타서 싸움을 벌인다(영화 ‘대부2’에서 행렬 장면). 나는 이번 안트베르펜 행렬의식에서 무엇인가를 따르는 데서 오는 고양감을 경험했다.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고양감에는, 뭔가를 리드하는 데서 오는 고양감도 있고, 저항하는 데서 오는 고양감도 있고, 함께 결정하는 데서 오는 고양감도 있고, 판을 깨는 데서 오는 고양감도 있지만, 묵종(默從)하는 데서 오는 고양감도 있다. 행렬을 구경하는 것이 아니라 행렬에 직접 참여할 때 비로소 자발성과 순종이 양립하는 기적이 일어난다.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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