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토링] 격변기, '준비된 리더'가 경쟁력이다

이남석 발행인 2024. 9. 8. 2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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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찰·열정·소통의 리더 이순신 80
당쟁만 일삼았던 조선 대신들
행패 극심했던 명나라 군사들
선조에게 상소문 올린 류성룡
군량미 쌓으면 다가올 전쟁 대비
위장전술로 왜적 물리친 순신

정유재란 때 이순신은 '군량미' 확보를 제1 과제로 삼았다. 군량미가 없으면 '긴 전쟁'에 대비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순신의 전략은 이게 끝이 아니었다. '군량미'를 확보하려는 왜적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 미끼까지 던졌다. 이순신이 연전연승을 거듭한 건 우연이 아니다. 그 밑바탕엔 '처절한 준비'가 있었다. 세계가 격변기를 맞았다. 이럴 때일수록 '준비된 지도자'가 필요하다. 우리에겐 그런 존재가 있을까.

스스로를 지킬 힘도 키우지 못하면서 당쟁만 일삼았던 조선의 대신들은 백성에게 다중고多重苦를 안겼다. 왜적에게는 학살과 약탈의 빌미를 제공했다. 이로 인해 국토는 폐허가 됐고 백성은 수년간 기아와 전염병에 허덕였다. 심지어 코까지 베이는 참혹한 일도 겪어야만 했다.

구원병을 자처한 명나라 군사들도 왜적과 다를 바 없었다. 류성룡이 선조에게 올린 상소문의 내용을 보자. "신은 지방에서 명나라 군사를 이바지하는 일을 살펴봤습니다. 아무리 나라의 힘을 다 모아 (명나라 군사를) 대접한다 해도 폐단은 끝이 없으니, 그 형편을 지탱하기 어렵겠습니다. 요즈음 남쪽으로 내려가는 명나라의 병사들은 길을 따라가면서 관민을 때리며 술과 밥을 요구하는 행패가 극심합니다. 지방 수령들조차 견디다 못해 먼 곳으로 피해 달아나버리고 하인들에게 일을 맡깁니다. 게다가 곁에서 소통할 역관도 없으니 그 무엄한 행패를 막을 길이 없습니다. 역참의 말까지도 빼앗고 돌려주지 않는 일이 아침저녁으로 끊임없이 계속됩니다. 민가에 우마라고는 다 빼앗아 가고 또 내놓으라고 졸라대니 백성들의 불행은 차마 말로 다 할 수 없는 지경입니다. 달리 구제할 계책은 없고, 다만 접반사 이덕형을 시켜 명군 제독에게 고하여 예하 장수들에게 영을 내리면 만에 하나라도 단속이 될 것인지, 이 또한 어떻게 될지 몰라 한갓 탄식만 합니다."

상소문의 내용처럼 조선은 명나라 군사들에게 군량미를 대면서도 모멸과 약탈을 당하는 수모를 감내해야 했다. 전시작전권인 군령권조차 없으니 입도 뻥끗하지 못했다. 다만, 이순신은 이런 상황에서도 미래를 대비했다.

"낙안, 흥양 등의 바다에서 왜적이 마음 놓고 마구 돌아다니니 분통이 터집니다. 바람도 잔잔해지니 왜군이 소란을 일으킬 것입니다. 2월 16일에 제장을 거느리고 보화도에서 바다로 나아가 17일 강진 경내의 고금도로 진을 옮겼습니다. 고금도는 호남 좌·우도의 내·외양을 제어할 수 있는 요충지로 산봉우리가 중첩해 있고 망볼 곳도 잇달아 있어 형세가 한산도보다 배나 좋습니다. 남쪽에는 지도가 있고 동쪽에는 조약도가 있으며, 농장 또한 많고 이미 들어와 거주하는 인구도 거의 1500호나 되기에 그들로 하여금 농사를 짓게 했습니다. 흥양과 광양은 계사년부터 둔전을 하던 곳으로 군민을 불러 모아 경작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순신은 지나칠 정도로 준비에 혼신을 쏟았다.[사진=더스

이순신이 1598년 무술년 2월 17일 통제영을 고금도로 옮긴 후 조정에 보고한 내용이다. 그는 고금도에서 무슨 일들을 했을까. 무술년 연초부터 9개월 동안 이순신의 행적이 담긴 일기는 없다. 다만, 유비무환을 무엇보다 강조한 이순신이 어떤 일들을 처리하고 준비했는지는 추측해 볼 수 있다. 대략 간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통제영 군사들과 명나라 수군 5000명의 먹을거리 준비/장졸과 일꾼 독려하며 전선 건조 물량 최대한 늘리기/명나라 수군 제독과 군사들이 머물 관아와 병영 짓기/안하무인 명나라 수군의 행패로부터 백성들을 지키기/진린 제독을 잘 구워삶아 동등한 군령권 유지하기/모여드는 백성들을 위한 치안 유지와 행정 업무/강진, 해남 일대에 얼쩡거리는 왜적들 소탕하기/순천왜성에 웅크리고 있는 소서행장 무리 정탐

고금도에 머물면서 군량미를 확보하는 데 힘을 쏟은 이순신은 놀랍게도 '또다른 준비'를 했다. 왜적이 군량미를 확보하기 위해 고금도를 쳐들어오지 못하도록 했던 거다. 일종의 위장전술이었다.

당시 순천왜성 앞 삼일포에는 모리민부의 함대가 진을 치고 있었다. 모리민부는 고금도에 이제 막 도착한 조선 수군의 군량미가 넉넉지 않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마침 왜적 수군 척후병이 달려와 "이순신이 동백도에 군량미를 쌓아뒀다"는 내용의 보고를 올렸다. 그러자 모리민부는 휘하의 정예함대 40여척을 거느리고 동백도로 쳐들어갔다. 왜적의 시선을 고금도에서 동백도로 돌리기 위해 이순신이 던져놓은 미끼에 걸려든 것이었다.

동백도에 상륙하려면 반드시 우장곶을 거쳐야 했다. 이순신은 우장곶에 수군 깃발을 수없이 꽂아 놓도록 하는 한편 동백도에는 나무를 쌓아 양식장처럼 보이도록 했다. 우장곶은 암초지대다. 이 사실을 알 턱이 없는 모리민부 함대는 단숨에 쳐들어오다가 암초에 병선 몇 척이 부서졌다. 안간힘을 써가며 동백도에 상륙했지만, 있다는 군량미 창고는 없고 나무뿐이었다. 속은 것을 알아챘지만 이미 늦었다.

섬 그늘에 복병하고 있던 조선 수군은 적선 10여 척을 순식간에 깨뜨리고 불살랐다. 왜선들이 도망치자 조선 수군은 절이도를 지나 장흥의 첨산도 앞바다까지 진출해 위세를 과시하며 모종의 훈련도 함께했다. 야습을 위한 선행 훈련이었다. 이후 새벽을 틈타 적 진영을 습격해 병선 10여척을 분멸하고 적병 100여급을 베었다.

공로를 세운 장수는 경상우수사 이순신을 비롯해 안위·우치적·배흥립·유형·송희립·김응함·송여종·이기남·조계종·이언량·황정록 등 제장이었다. 이순신은 승전고를 울리며 군을 거둬 고금도로 돌아왔다. 적장 모리민부는 순천왜성으로 달아나 소서행장의 진영으로 들어갔다.

이 소식에 호남 일대는 물론 먼 지역에서도 의용 장정들이 더욱 몰려들어 수군 병력이 자연스럽게 확충됐다. 고금도 통제영의 병력은 한산도 시절의 5000여명을 훌쩍 넘은 8000여명에 이르렀다. 여기에 명나라 수군까지 합류할 예정이었다. 따라서 이순신에게는 엄청난 군량미를 마련하는 게 큰 숙제가 됐다. <다음호에 계속>

이남석 더스쿠프 발행인
cvo@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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