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디지털 성범죄’ 지옥문을 폐쇄하라

김재중 기자 2024. 9. 8. 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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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성범죄의 지옥문은 이미 열려 있다.” 2021~2022년 법무부 디지털 성범죄 전문 태스크포스(TF) 팀장을 지낸 서지현 전 검사의 말이다. 그의 말처럼 최근 한국 사회는 텔레그램으로 대표되는 익명 채팅 앱을 기반으로 딥페이크 성착취물이 초중고교와 대학교, 군대, 직장, 심지어 집 안까지 창궐했다는 사실이 드러나 충격에 휩싸였다.

15세기 유럽 화가 히에로니무스 보스가 그린 ‘세속적인 쾌락의 정원’이라는 작품이 있다. 예술·미술 교양에 관한 책이나 유튜브 영상에 단골로 등장하는 이 그림은 3개의 화면으로 분할돼 있다. 왼쪽은 천국, 가운데는 인간 세계, 오른쪽은 지옥을 상징한다고 설명된다. 이 작품 속의 인간은 모두 벌거벗고 있는데 인간과 동물이 결합된 모습이라든가, 인간이 동물 또는 식물에 괴롭힘을 당하거나 함께 쾌락을 즐기는 모습, 인간의 몸이 칼이나 쇠꼬챙이에 찔린 모습 등 기괴한 장면으로 가득 차 있다.

특히 괴물에게 산 채로 잡아먹히고 고문당하며 신음하는 여러 인간이 등장하는 지옥의 모습은 섬뜩하기 그지없다. 이 그림은 기독교적 세계관에 입각해 에덴동산에 살던 인간이 욕망과 쾌락에 사로잡혀 타락한 현재를 살고 있으며, 이후 지옥에서 고통을 받게 된다는 은유를 담았다는 해석이 일반적이다.

지옥의 특징은 극도의 공포와 고통에서 헤어나올 수 없는 ‘고통의 영원성’이다. 실제로 자신의 얼굴 사진이 나체와 합성되거나 ‘능욕’을 당하는 동영상으로 합성돼 퍼지고, 이를 바탕으로 외설적이거나 위협적인 메시지를 받는 피해를 당한 사람들은 마치 불에 타는 것 같은 고통을 느꼈고, 시간이 흘러도 공포가 줄어들지 않는다고 증언한다. 실제 몸이 납치되진 않았지만 극도의 수치심과 치욕을 안긴다는 점에서 ‘인신매매’나 다름없다.

여러 종교에서 지옥은 신을 부정했든, 범죄를 저질렀든, 욕망에 굴복해 타락했든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한 벌로 죽은 뒤 가게 되는 곳으로 그려진다. 디지털 성범죄 지옥은 다르다. 소셜미디어에 올린 내 프로필 사진을 누군가 몰래 가져다가 성적인 사진이나 영상으로 둔갑시켜 조리돌림하는 게 대체 나의 죄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동급생이나 동창, 직장 동료, 심지어 연인이나 사촌 등 ‘지인’을 먹잇감으로 삼는다는 이른바 ‘지인능욕’은 더욱 충격적이다. 내 얼굴을 치욕스러운 사진, 동영상에 붙여 음담패설을 쏟아내고, 익명으로 협박해 겁에 질린 반응을 보면서 쾌락을 느낀 사람이 내가 아는 누군가라면 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런데 서 전 검사의 말에서 가장 주목할 부분은 ‘지옥’보다는 ‘이미’라는 단어이다. 그는 지난주 경향신문과 인터뷰하면서 3년 전 법무부 TF 팀장을 맡아 디지털 성범죄의 현황과 대책을 연구할 당시부터 이 말을 하면서 구체적인 대응책을 내놓았지만 정부와 국회는 귀 기울이지 않았다고 개탄했다. 실제로 최근 드러난 딥페이크 성범죄 양태는 2019년 터진 ‘n번방’ 사건과 별반 다르지 않다. 성착취물 제작에 동원되는 딥페이크 기술이 더 간편해지고 정교해졌으며 가해자 집단의 나이와 범위가 더 넓어졌다는 게 차이라면 차이다.

이번 사태가 터진 직후 국회에 관련 법안이 무더기로 쏟아졌다. 지난 4일 기준 29건이었다. 역시 디지털 성범죄의 실태와 원인, 대책을 사회가 이미 알고 있었다는 방증이다.

그렇지만 개별적인 법안이나 단편적인 정책으로 대처하기엔 사태가 너무 광범위하고 심각하다. 가해자를 지목하기 위한 수사와 처벌, 추가 피해 차단, 피해자 보호 및 회복 지원 등 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다. 학생·청소년이 가해자 집단에 새로 편입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교육도 시급하다. 여성가족부, 행정안전부(경찰), 법무부(검찰), 외교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방송통신위원회, 교육부, 보건복지부 등 사실상 거의 모든 정부 부처를 가로지르는 일들이다. 심지어 국방부도 ‘여군 딥페이크방’을 해결해야 한다. 무엇보다 디지털 성범죄의 주요 수단으로 이용되면서도 사전적·사후적 대처에 미온적인 해외 플랫폼 사업자의 협조를 구하고, 압박하려면 국회의 입법을 바탕으로 수사당국과 통신당국, 외교당국의 공조가 긴요하다.

온 사회가 나서야 한다. 대통령, 최소한 국무총리가 나서서 범정부 대책기구를 소집하고 종합 대책을 마련하고 추진해야 한다. 이미 열려 있는 디지털 성범죄의 지옥문을 지금 닫지 못하면 우리 사회의 미래는 없다.

김재중 사회부장

김재중 사회부장 herme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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