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GO 발언대]어떤 동네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서울의 여러 주택가를 지나다보면 ‘신속통합기획’이라는 서울시 재개발 사업 지역 선정을 축하하는 플래카드를 자주 볼 수 있다. 그러나 지역 토지주들의 기대와 달리, 2년 가까이 흐르는 동안 재개발 사업은 크게 진전되진 못했다. 코로나19 팬데믹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급등한 건축 자재 비용과 지속적인 부동산 시장의 경직 상태가 개발 사업의 발목을 잡고 있다. 막대한 수익률을 요구하는 디벨로퍼 업계의 관행도 여전히 문제다. 과거 재개발 붐의 영광만을 기대하는 사람들이 만족할 만한 조건은 당분간 기대하기 어려울 듯하다.
어차피 세입자로 살며 떠도는 사람들에게 재개발이 돈이 되는지 따위는 다른 세계 이야기이다. 다만 대규모 개발이라는 신기루로 인해, 자신이 거주하는 동네가 낡고 불편하며 위험하게 방치되는 것은 일상에 치명적인 문제를 야기한다. 다세대, 다가구 주택이 밀집한 저층주거지의 노후화는 이미 심각한 상황이다. 생활의 불편함은 물론 반지하 침수 등 재난 상황에 특히 취약하다. 당장 모든 저층주거지 주민을 아파트로 이주시킬 수도 없기에, 민간이든 공공이든 적절한 자원 투입과 정비가 필요하다. 그러나 많은 이가 재개발만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방치한 탓에 벌써 많은 시간을 허비해버렸다.
언젠가는 싹 밀고 깨끗하게 정비될 것이라는 희망고문에 기대지 말고, 공공이 적극적으로 개입해 지역 곳곳에 양질의 주택과 기반시설 및 편의시설을 공급해야 한다. 이미 도심 내 공공주택을 공급하는 수단으로 ‘매입임대주택’ 정책이 시행되고 있다. 저소득층에게는 지역 내 일자리, 복지, 관계망이 촘촘하게 연결돼 있어 기존 생활권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재개발이 되면 이들 대부분은 쫓겨나야 하지만, 매입임대주택을 통해 저렴한 공공주택을 공급받으면 동네를 떠나지 않고도 안전한 주거복지의 테두리 내에 머무를 수 있게 된다. 2004년 시범사업 이후 20년간 매입임대주택 성과와 필요성은 명확하게 입증되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과거의 대규모 개발 환상에서 나오지 못한 일부 지방공사나 시민단체가 이 정책을 폄훼하는 것은 매우 우려스럽다.
1기 신도시와 같이 자본이 집중되는 곳에는 모든 이해당사자가 대책을 강구하지만, 자본과 정치가 외면하는 곳으로 향하는 정책은 너무나 부족하다. 매입임대주택은 작지만 중요한 역할을 해내고 있으며, 최근에는 생활형 사회간접자본, 돌봄 서비스 등을 결합한 특화형 임대주택의 공급 확대라는 반가운 소식도 들렸다. 물론 일부 주택을 고가에 매입하는 문제는 보완책이 필요하다. 또한 준공된 주택 매입뿐만 아니라 토지은행, 선매수권, 우선협상권 등 공공이 토지를 확보하는 방식도 다양화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어떤 동네에 산다는 이유로 불편함과 위험을 감수하며 살게 내버려둬선 안 된다. 개선의 여지 없이 일상을 살아가는 도시의 불평등을 그저 보고만 있지는 말자.
이한솔 한국사회주택협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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